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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2023년 9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청산할 것을 제기했다. 여기에 대해 이송규, 문철, 윤 영택, 박휘일의 비판과 토의가 계속 진행되었다. 그 러나 결국은 시간을 이유로 신 중앙위원회에 일임하 기로 했다. 이후 선언을 김천해가 낭독하여 통과되 고, 조선일보 정간에 관한 건과 일본좌익 3단체 해체 에 관한 건, 그리고 경성여자상업학교 맹휴사건, 차 기대회 장소 결정의 건이 가결되었다. 전술했듯이 둘째날 대회에서는 진상소위원회 가 열려 ‘오사카사건’이 처리되었다. ‘오사카사건’은 1928년 3월 28일 오사카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회 가 오사카조선노동조합 의 김 수현에게 도난(東南)지부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하부조직인 도호쿠(東北)지부 상임집행위원회에 새로이 취 임한 김광을 제명하기로 결정 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지도로 재일본조선노동총동 맹 중앙에서는 권대형을 파견 하여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 나 반간부파 대의원들의 오사 카조선노동조합 확대집행위 원회는 두 차례의 대회를 열 어 4명의 제명을 결정했다. 결 국 1928년 4월 11일 오사카 조선노동조합 확대집행위원 회는 남영우, 윤동명, 김수현, 안종길을 분리주의자로 제명 하고, 김광을 복권하기로 한 내용을 받아들였다. 제2차 4월 23일 위원회는 제명 당한 사람들을 포함한 소위 간부파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4명의 제명과 신간부의 선임을 했다. 당시 신 집행위원을 보면 위원장 송장복, 김문준, 김병국, 김 달환, 김광 등이 맡았다. 김문준은 여기에 이름을 올 렸다. 문제는 여기에 대항하여 제명당한 간부들이 ‘부당성’을 호소하기 위해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 앙에 부당성을 상소한다고 선언했던 사실이다. 이런 ‘오사카사건’ 처리 상황은 심의가 시작되자 김문준이 ‘오사카사건’의 진상을 호소하고 제명의 정 제주도와 오사카를 오갔던 일본배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 위)와 김문준 등 제주도민들 이 돈을 모아 산 배로 일본배 대신 제주도와 오사카를 왕래하는 데 이용됐던 배 후시키마 루(伏木丸, 아래). (오마이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