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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재일한인 독립운동사의 신조명 ③ 79 년 6월에 오사카조선노동조합대회 교육부장을 맡았 고, 1928년 7월에는 오사카조선인거주권획득동맹 을조직하여, 연설회를 개최했다. 이듬해 12월 14일 에는 오사카에서 열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전국 대표자회의 및 확대집행위원회 오사카대표로 참석 하여 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한편, 1929년 말부터 다음 해에 걸쳐 오사카 고무 공장의 조선인 노동자 사이에서 개별적인 공장을 초 월하여 ‘지역 제네스트(총파업)’라고 할 만한 쟁의를 전개했다. 1930년 1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일 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로 해소하는데 반대했 다. 김호영 등의 전협 조선인위원회와 격렬하게 대 립했다. 그는 김호영 등의 전협 조선인위원회가 관 서(關西)사무국을 확립한 것과 별도로 전협 오사카지 방사무국을 지도했다. 이런 그도 1930년 4월에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 맹 오사카조선인노동조합의 북부지부를 전협 오사 카 화학노조로 해소하고, 같은 해 5월에 일본화학산 업노조 오사카지부로 바꿔 책임자가 되었다. 오사카 지부의 선전물이었던 『뉴스』 및 격문과 『제2무산자 신문』 등을 배포하는 등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930년 6월 이즈미(泉)고무공장의 스트라 이크를 발전시키던 중 8월 검거되어 10월에 기소되 었다. 1931년 12월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32년 4월 12일 항소심에서 2 년 6개월의 형을 언도받아 사카이형무소에 수감되 었다. 한편 투옥 중에는 조몽구가 전협 화학노조 오 사카지부 책임자가 되어 투쟁을 계속하였다. 수감 중에도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여 1934년에는 그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오사카-제주도 사이의 특고 (特高)경찰의 활동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김문준이 한 시기 재일조선인운동, 특히 오사카지방 조선인운동을 주도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제4회 대회와 김문준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사에서 재일본조선노동총동 맹의 중요성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 조직 의 1928년 제4회 대회는 지역 중심주의와 중앙중심 주의의 대립이 표출되었고, 이 대립에서 김문준은 그 한가운데 있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제4회 대회는 원래 계획 보다 늦게 1928년 5월 13, 14일 양일간 제대셋츠루 멘트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 대회의 간부는 의장 송 창렴, 김천해, 서기 강낙섭, 김두진, 이상조였다. 첫째날은 1928년 5월 13일 오전 10시에 시작되어 오후 5시 12분까지 열렸고 선언, 개회사 낭독 축사 가 이어졌다. 이날 회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영우 자격문제에 대한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둘째, 각 지방보고가 있었다. 셋째, 검속 교섭위원을 선임 했다. 둘째날은 14일 오후 5시부터 시작되어 10시까지 열렸다. 10여개 단체의 축전과 축문의 낭독이 있었 고 이진, 김정홍이 의사진행계로 선정되었다. 이 날 은 ‘오사카사건’ 진상소위원회의 보고가 있었다. 구 체적인 내용으로는 첫째, 윤동명과 남영우의 제명을 취소한다, 둘째, 정남국을 무기정권에 처한다, 셋째, 김광은 제명한다. 넷째, 심사위원의 보고와 보고 내 용에 대한 질의응답 이후 중요사항이 가결되었다. 김문준은 과거 『대중신문』이 오류를 범했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