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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2023년 9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9월의 독립운동가 상하이로 건너가 중국 공학대학(公學大學) 경제학과 에서 2년간 수학했다. 이때 구익균 등과 학술적 교 류를 시작하는 한편, 김두봉에게 한글 교육을 받으 며 민족 교육에 심취하게 되었다. 일시 귀국했다가 1933년 다시 중국행을 선택하여 광저우(廣州)에 있 는 중산대학에 입학했다. 1930년대 초중반 중산대학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집중적으로 모여든 곳이었는데, 그 중에는 한국독립 당 광동지부를 맡고 있는 김붕준의 딸 김효숙도 있 었다. 송면수는 김효숙을 비롯한 한국인 학생들과 교류하며 한글 전파에 힘썼다. 한편으로 그는 한국 국민당계 청년들을 결집하여 무장유격대를 결성하 기도 했다. 유격대는 1937년 한국국민당 청년단의 근간이 되었다. 문화활동과 무장투쟁을 병행하면서 광저우에서 한글 납활자를 고안한 후, 피난길에도 지고 날랐다고 한다. 임시정부 피난길을 함께하면서, 1938년 창사(長 沙)에서 열린 3 · 1절 기념행사에서 공연된 「 삼일혼 (三一魂)」 과 「 전야(前夜)」 두 편의 연극 극본을 짓고 직접 연기하기도 했다. 이어 류저우(柳州)에서는 한 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 결성을 주도하고, 희극조의 대표를 맡아 청년공작대의 선전 예술활동을 책임졌 다. 이때 한중연합군의 투쟁을 그린 「 국경의 밤」 과 부상당한 병사를 민중들의 보살핌을 그린 「 상병의 벗 」 두 편의 단막극을 연출하였다. 1939년 11월 전지공작대 창설에 참여했다. 계속 해서 항일연극 등을 연출하며 선전 활동을 책임졌 다. 그리고 1940년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여 통신병과를 이수하여 1943년 졸업했다. 그 사이 전 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됨에 따라 제2지대의 정훈조장을 맡게 되었다. 1943년 8월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대회에 참가 하여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겸 선전부 주임으로 선임되었다, 이 무렵부터 임시정부 활동을 병행했 다. 1944년에는 문화부 편집위원과 선전부 편집위 원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이 폐지되고, 미군과의 공조가 진전되 자 미국 OSS와의 정보활동을 담당했다. 국내 진공 송면수와 김효숙이 다녔던 중국 중산대학 그랜드홀과 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