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page

9월의 독립운동가 • 이재현 · 한형석 · 송면수 선생 67 업했다. 이 무렵 상하이에서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이후 한인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졌다. 이에 한 형석은 한유한(韓悠韓)으로 개명한 후, 화북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산둥성[山東 省]과 카이펑(開封), 시안(西安) 등지의 학교에서 예술 교사를 지내거나 중국 국민정부군에서 항일연극대 장 등을 맡기도 했다. 1939년에는 중국 중앙군 34집 단군 제10사 정치부 공작대장을 역임했다. 1939년 1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결성에 참여한 그는 예술조장이 되어 항일 선전을 위한 예술 활동 을 책임졌다. 1940년 5월 한중 연대의 일환으로 시 안에서 열린 ‘아리랑’ 공연은 한국 청년의 항일 의식 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아리랑 공연의 연출과 위문 연극 ‘한국의 한 용사’를 편극하고, 가극 ‘아리랑’까지 작곡 · 편곡 · 지휘하며 10일간의 공연을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1940년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에 설치된 한국청년훈련반(이하 한청반)에서 교관을 맡았고, 1941년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이는 1941년 전 지공작대의 한국광복군 편입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 광복군 제2지대 선전부장을 담당하여 공식 군가인 ‘광복군가’를 짓고 ‘압록강 행진곡’ 등을 작곡했다. 최 전선에서 이뤄진 선전 활동에 힘입어 광복군은 지속 적으로 병력을 증강할 수 있었다. 1943년 그가 간행 한 『광복군가집』 제1 · 제2집은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우리나라의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1945년 8월 광복 후 산둥성 지난(濟南) 등지에서 한인 교포를 보호하고 귀환를 돕는 활동을 하다가 1948년 9월 칭다오(靑島)를 통해 30년 만에 조국으 로 귀국하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 포장)을 수여하였다. 한국광복군 정훈의 상징, 송면수 1910년 강원도 회양에서 태어난 송면수는 평양에 서 성장하며 기독교계 학교인 광성소학교와 광성고 등보통학교 등을 졸업했다. 1929년 광성고보를 졸 업한 후 잠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아리랑’ 육필 원고 항일가극 ‘아리랑’ 포스터 한형석의 ‘아리랑’ 악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