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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박재혁(朴載爀) 의사 57 년 2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다시 사형이 선고되었다. 즉시 상고했지만 이유 없다며 각하되었다. 변호인이 법률적용 오류를 이유 로 다시 상고했으나, 같은 해 3월 31일 고등 법원에서 기각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 선고 뒤 “왜놈 손에 죽느니 내 스스로 죽겠다” 단식 순국 대구형무소 수감 당시 상처는 어느 정도 나 았지만,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면회 온 최천택에게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 어도 아무런 한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뒤 “왜놈 손에 사형 당하기 싫어서” 단식에 돌입 하여 9일 만인 1921년 5월 11일 기진하여 옥 중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일제 당국은 숙환이던 폐병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하였다. 그의 시신은 노모와 최천택이 인수했다. 5 월 14일 기차 편으로 운구되어 부산 고관역 (古舘 驛)에 도착했다. 이때 역 앞에 모여서 애 도하는 친척·친구·시민들을 경찰이 강제해산 시켰다. 또 장례에는 남자 2명과 여자 3명의 가족·친족만 참가하게 했으며, 입관 때도 인 부 2명만 쓰도록 제한했다. 부산 좌천동의 공 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유해는 1969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현재 국립서울현충원)묘지 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1948년 동지들이 정공단(鄭公檀) 옆에 ‘의 사 박재혁비’를 세웠고, 1981년 모교인 부산 진초등학교(육영학교 후신)로 옮겼다. 1998 년 5월에는 부산진구 초읍동에 위치한 어린 이대공원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을 추서하였다. 박재혁 의사상(부산 어린이대공원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