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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박재혁(朴載爀) 의사 55 내렸다. 당초 예정이던 시모노세키에서의 관 부연락선 승선은 일본 경찰의 검문에 걸릴 우려가 있어, 일부러 대마도(對馬島)로 가서 이즈하라(嚴原)에서 출항하는 배를 타고 9월 7일 부산으로 들어왔다. 앞서 9월 4일 나가 사키에서 상하이의 김원봉에게 상업연락 서 신으로 위장하여 보낸 편지의 끝에, “연락선 타지 말고 대마도로써 간다(熱落仙他地末古 對馬島路徐看多)”라는 차음식(借音式) 암호문 구를 덧붙여 보냈다. 그러나 입국 사실은 경찰에 탐지되어 예의 주시되었고, 부산경찰서의 사카이 (坂井) 형사 등이 친지들을 찾아와 탐문하 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에 입국 이 후 13일까지 일주일간 최천택·김영주(金 永柱)와 함께 동래온천·해운대·범어사(梵 魚寺) 원효암(元曉庵) 등지를 돌아다니며 거사 기회를 노렸다. 중국 고서상으로 위장, 부산경찰서장 앞 에서 폭탄 터뜨려 1920년 9월 13일, 최천택과 함께 용두산에 올 라가 경찰서 경내 와 주변을 내려다 보며 정찰하고 귀 가하였다. 이튿날 14일 오후 중국 인 고서적상으로 변장한 후 책보자기에 폭탄을 넣어 휴대하 고 전차로 부산역까지 이동한 뒤, 2시 30분 경 경찰서에 도착했다. 정문을 지나 곧장 1 층으로 들어선 후, 집무 중인 서장 하시모토 (橋本) 경시(警視)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 주앉아 담화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보자기를 끌러서 진기한 중국고서를 보여주는 척하며 폭탄을 꺼내들어 탁자 밑으로 서장을 향해 내던졌다. 부산경찰서 폭파 거사 전날인 1920년 9월 13일 동기 최천택(오른쪽)과 촬영한  박재혁 의사(국가보훈부 제공) 「부산서의 폭탄 소요」(『부산일보』 1920년 9월 14일자 호외 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