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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나철(羅喆) 선생 51 약」의 체결로 나라의 국권을 일본에게 완전 히 빼앗기자 새로운 구국운동과 민족중흥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나라가 이 지경 에 이른 원인은 무엇보다 오랫동안 사대모화 (事大慕華) 사상에서 비롯된 교육의 잘못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강대한 외 세가 밀려오면 민족과 국가를 수호하는 일에 앞장서기보다는 힘센 외세에 붙어서 자신의 영화와 출세만을 추구하게 되었고, 또 각각 친중·친일 · 친러(親露)로 처신하며 서로 자기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데 급급했다고 생각하 였다. 결국 간사하고 교활한 기회주의가 만 연하게 되어 나라는 부패하고 민족의 기상이 꺾였다고 보았다. 이에 선생은 흔들리는 민족정신을 바로잡 기 위해 단군(檀君)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작 업에 착수했다. 단군 정신으로 민족고유의 종교역사를 완성하고, 민족정기를 새롭게 하 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인구세(濟人救 世)’를 기해 보자는 의도였다. 1909년 1월 15 일 평소 뜻을 같이 하던 오기호 · 이기 · 김윤식 (金允植)·유근(柳瑾) 등 수십 명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에서 제천의식을 갖추고 단군교를 공식 종교로 공표하였다. 이후 교주인 도사교(都司敎)로 추대되어 1910년 7월 30일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때 까지 한얼교 또는 천신교로 불리던 단군교를 ‘대종교(大倧敎)’로 개명하고 대종교의 창시자 가 되었다. 북간도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겨 수많은 애국지사를 양성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포교활동이 어렵게 되자, 단군이 남긴 손길과 발자취를 나철이 딸에게 남긴 유서(나철기념관 제공)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파호에 있는 대종교 3종사 묘역(가운데가 나철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