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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23년 9월 Special Theme  관동대지진 100주년 특집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역(大逆)사건’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박열사 건은 1910년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를 사형에 처 한 이후 히로히토 천황을 저격하려 한 난바 다이스케 (難波大助) 사건, 1932년 이봉창 의거와 더불어 일본 의 ‘4대 대역사건’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대역사건’의 원인, 6천여 조선인과 사회주의자에 대한 대학살 이른바 ‘박열 대역사건’의 핵심은 간토 대진재 와중 에 일본 군대와 경찰, 자경단에 의해 잔혹하게 희생 당한 6천여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의 책임을 모면하 려는 일본 정부의 공작에 의해 꾸며졌다는 사실에 있 다. 특히 사건의 배경이 된 간토 조선인대학살에 대 한 일본 정부의 조사와 사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 에서 물증도 없이 혐의와 진술만으로 대역사건으로 몰아 22년 2개월 동안 감옥에 가둔 법률적·역사적 청 산도 과제로 남아 있다는 특징도 갖고 있다. 중국 상하이(上海)의 독립신문사에서는 재일 한인 들의 피살사실이 알려진 직후에 1923년 9월 4일자 부터 도쿄 대진재 상황을 호외로 보도하였다. 이후 나 고야(名古屋)에 있던 한세복(韓世復)으로 하여금 천 도 교청년회의 이철(李鐵) · 박사직(朴思稷) · 최승만(崔承 萬)·민석현(閔錫鉉)·이창근(李昌根)·이근무(李根茂) 등 유학생 10여 명으로 구성된 ‘특파조사원’들을 각지 로 파견해 실태를 조사하도록 했다. 조사원들은 살아 남은 동포들을 찾아 증언을 채록하고 현장을 조사하 여 1차로 독립신문사 사장인 김승학에게 보고하였다. 「一萬의 희생자!!!」란 제목으로 1923년 12월 5일 『독 립신문』에 게재된 학살자의 수는 6,661명에 이른다. 계엄군으로 출동한 헌병 대위인 아마카스 마사히 코(甘粕正彦)는 지진을 피해 친척집에 있던 오스기 사카에(大衫榮)와 그의 처 이토 노에(伊藤野枝), 어린 조카 등 3명을 연행해 무참히 살해한 후 우물에 유기 하였다. 1967년의 감정서와 1968년에 나온 보고서 에 의하면, 그의 사인은 구타에 의한 질식사라고 한 다. 아마카스 대위는 “평소 사회주의자의 행동이 국 가에 유해하다고 생각”했고, 오스기 사카에가 지진 재해의 혼란을 틈타 “어떤 불령(不逞) 모의를 실행할 것을 우려해 본인 스스로 국가의 해악을 제거하려는 동기에서” 학살을 자행했다고 주장하였다. 9월 4일 에는 노동조합 단체 사무실이 운집해 있는 도쿄 빈민 가 가메이도(龜戶) 거리에서 9명의 노동조합 간부들 이 경찰서에 연행되었는데, 이들도 경찰에 의해 무장 한 자경단에 인도되어 무참히 살해되었다. 조선인학살의 책임을 모면하려 기획된 ‘박열사건’ 박열은 9월 2일 오후 2시경 간토대지진의 피해가 궁금하고 잡지 『現社會(현사회)』의 발간비용을 받기 위해 국수주의자 기타 잇키(北一輝)를 방문하고 돌아 오는 길에 집 앞에서 대기하던 경찰들에 의해 피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만난 오뎅집(도쿄, 현재는 이와사키식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