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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3년 9월 Special Theme  관동대지진 100주년 특집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면서 학살의 책임을 오히려 조선인에게로 돌렸다. 이후 임시정부의 외교적 대응은 더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비록 외교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임시 정부 항의서」은 일본정부에게 공식적으로 대응을 요 구한 유일한 ‘외교문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 이 문건이 『독립신문』에 실렸던 점을 감안하면, 이 문건의 목적은 조선인 학살 사실에 대한 선전의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건 은 기본적으로 일본 정부에 전해질 목적으로 작성된 외교문건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 직접적인 해명 이나 사과와 같은 책임을 묻기보다, 비교적 정제된 표현을 통해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한 일본정 부 차 원의 책임 있는 ‘처리’ 정도만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 이 특징이다. 일본정부가 사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어 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임시정부 역시 그것을 예 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시정부는 다른 방 식의 대응을 준비했다. 이 시기 임시정부의 움직임 에 주목한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조선헌병대사령부 는 임시정부가 무력적인 활동을 전개하려고 시도하 고 있다고 보았다. 독립군 각 진에 중대한 명령을 전 해 북간도 지역의 독립단체에 결사대 지원자를 선발 하고 폭탄 투척을 연습한다거나, 총동원령을 내리고 활동을 개시하려고 한다거나, 국무원을 통해 포고문 을 작성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시도 들이 모두 현실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관동대지진 과 조선인 학살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조선의 치안 을 담당하고 있는 식민권력의 높아진 감시의 결과였 을 것이다. 『독립신문』을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관 동대학살에 대한 『독립신문』의 움직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피학살자 수에 관 한 『독립신문』의 보도이다. 관동대학살 당시 피살자 수는 현재까지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것은 일본정부가 조선인 학살 사실을 조직적으로 은폐했 기 때문이며, 조선인 학살의 가해자인 민중 역시 관 련한 사실을 증언하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조선인 학살자가 ‘2명’에 불과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현재까지 관동대학살 당시의 피학살자 수로 알 일본군(계엄군)과 경찰이 행인을 검문하는 모습을 그린 화첩(강 덕상자료센터 제공) 계엄군들이 연행한 조선인을 눕혀 놓고 감시하고 있다(통일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