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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동대학살 39 라진 점이다. 「임시정부 항의서」에 묘사된 조선인은 일본인과 똑같이 피해를 입은 “재민(災民)”이자, “무고 한” 사람들임을 강조하고 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조 선인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했을 뿐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마치 전쟁포로처럼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다는 것이 임시정부가 파악한 조선인의 상태였다. 여기서 언급된 ‘수용소’란 무엇일까? 당시 일본정 부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나라시노(習志 野), 메구로(目黒 ), 이리야마즈(不入斗), 가잔마루(華 山丸), 가네마루가하라((金丸ケ原) 수용소를 운영했 다. 그러나 많은 연구가 지적하고 있듯이 일본정부 가 운영한 조선인 수용소는 또 다른 차별과 폭력의 공간이었다. 수용소 안과 밖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죽음을 맞았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수용소 내부에서 의 폭력을 일상적으로 견뎌야 했다. 임시정부가 조 선인 수용소 내부의 사정을 명확히 판단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인 수용을 전후 하여 조선인에게 가해진 폭력이 존재한다고 인식하 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임시정부는 끝머리에 세 가지 사항을 요구하고 있다. 그 내용은 “첫째, 불법· 강제로 수용된 1만 5천 명의 한인을 석방할 것. 둘째, 모든 재해구역에 있는 한인의 생사 여부와 성명, 연 령, 주소를 조사하여 발표할 것. 셋째, 한인을 잔인하 게 죽인 무리들을 관리들에게 묻지 말고 엄중히 처 벌할 것”이다. 수용된 조선인에 대한 조속한 석방, 생 존자·피학살자에 대한 그러면서 이 서신을 받은 후 5 일 안으로 답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정부의 사실 은폐와 책임 회피 그렇다면 「임시정부 항의서」에 대한 일본정부의 답변은 어땠을까? 『독립신문』 1923년 10월 13일 자 「한인 학살에 대한 적의 발표」라는 기사에 그 내용이 확인된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조선인 폭동이 실제 로 존재했으며, 조선인과 일부 중국인이 죽음을 맞 은 것은 “격앙된 민심”에 따른 부득이한 상황이었고, 조선인 보호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선인 폭 동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조선인과 중국인이 희생되 었지만, 국가(일본)의 책임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 듯 임시정부의 세 가지 요구사항에 대해 일본정부는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하였다. 그뿐 아니라 ‘불령선인’ 의 존재로 인해 조선인들이 학살된 것이라고 주장하 자경단의 자의적 조선인 연행, 체포 장면(통일뉴스 제공) 아오야마 수용소의 조선인들(강덕상자료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