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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동대학살 37 상하이 『독립신문』은 1923년 9월  4일자 「호외」로 지진 관련 소식을  최초 보도했다. 또 대한민국임시정 부는 9월 10일 일본 정부에 항의 문을 발송하는 등 기민하게 대응했 다. 『독립신문』 보도 기사에 실린  ‘6,661명’은 조선인 피학살자 수에  관한 여러 자료 가운데 가장 신빙 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현재까지 한국 정부는 이 사건에 관 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 답변과 사과 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 는 여전히 국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 다. 100년 전 임시정부의 요구사항 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대지진 직후 사실무근 ‘조선인 폭동설’ 유포돼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関 東)지역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관 동지역 1부(府) 6현(縣)을 강타한 대지진은 수많은 사상자와 피해를 남 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무근의 유언비어, 즉 ‘조선인 폭동 설’이 퍼져나갔다. 이를 근거로 일본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그 결과 수많은 조선인들이 지진과 화재가 아닌, 학살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정부는 조선인 학살의 소식이 퍼져나가 는 것을 막기 위해 강력한 언론통제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때문에 해외 조선인 사회에서는 일본 내에서 조선인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관동대지진이 최초로 언급된 9월 4일 자 『독립 신문』의 「호외」에는 일본 내의 피해 상황이나 주요 간부의 암살설 등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실려있었다. 이때 보도는 지진, 폭풍, 해일 등 천재지변에 관한 내용이거나 인명과 건물피해 등 일반적인 재난 보도 에 가까웠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당시 관동지역에 퍼졌 던 유언비어, 즉 ‘조선인 폭동설’에 관한 태도이다. 「호외」에서는 조선인들의 폭동을 사실로써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쿄 · 요코하마 지역 조선인들이 지진을 기회 삼아 아카바네(赤羽) 등 화약고를 폭파하려는 시도가 있다거나, 도쿄에서 추방된 조선인이 무 기를 휴대해 하치오지(八王子)에 침입하여 제13사단과 충돌했다는 이 『독립신문』 발행 호외, 1923년 9월 4일자. 독립신문사에서 국내로 발송했다가 일제 당 국에 압수된 것이다. 조선인 피해규모를 최초로 조사하여  보도한 독립신문 기사(1923.12.5,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