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page

34 2023년 9월 Special Theme  관동대지진 100주년 특집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한편 도쿄 조선대학교가 편찬한 『간토대진재 시 조선인학살의 진상과 실태』의 신창범의 기억은 사실 적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아라카와 둑길, 케이센철교 근처에서) 4일 아침 2 시 경이었던 것 같아요. 어리마리한 속에 “조선인을 집어내라”, “조선인을 죽여라” 등 소리가 들려왔습니 다. …잠시 후 저쪽에서 무장한 일단이 잠자고 있는 피난민을 한사람씩 깨우고 조선인인지를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앉아있다가는 저도 살해당함 이 분명합니다. 저는 옆에 있던 동생 훈범과 자형 에 게 신호를 보내 철교 위에서 정신없이 뛰어내렸습니 다. 뛰어내려 보니 거기에는 5~6명의 동포들이 역시 뛰어내려 왔었습니다. 그렇지만 뛰어내린 걸 자경단 은 알고 있기 때문에 곧바로 쫓아오기는 분명했습니 다. …총성은 연이어 들려옵니다. …저는 자경단의 일 본도에 베이고 죽창으로 찔려서 정신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왼쪽 어깨의 이 상처는 일본도로 베인 상 처이며 오른쪽 겨드랑이의 이 상처는 죽창으로 찔린 흔적입니다. 오른쪽 볼의 이것은 무엇으로 상처가 났 구술자 구술 내용1 조인승 요츠기다리를 건너서 1일 밤은 동포 14명이 뭉쳐서 있었다. 거기에 소방단이 4명 와서 포승으로 우리를 줄줄이 묶어  가만히 있어라고 해. ‘우린 가겠지만 포승줄을 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내 발에도 쇠갈고리를 걸었던 거야. 다리에는  시체들이 가득 찼다. 둑길에도 땔나무가 더미로 쌓여있듯이 시체 더미들이 쌓여져 있었다. 토야마(가명) 1일 밤 “해일이다”라고 하는 소리에 구 요츠기다리의 둑 근처 벌판에 피난했다. 그 벌판에 있을 때 조선인소동으로  난리 났었지. …살해된 조선인은 많았다. 20~30명 정도 살해당했던 것일까. 죽인 것은 일반인들이었다. …둑에 있었던  재향군인과 경관이 “조선인이 일부러 지진해일의 소문을 퍼뜨려 집을 비우는 것을 노리고 도둑질을 하고 있으니, 집을  비우지 말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시마가와 둘째 날(9월 2일)에 요츠기다리를 건너 혼다무라(현 카츠시카구)의 뜰을 빌려 다 같이 노숙을 했어요. …8~9시 경,  “조선인이 쳐들어 왔다”는 소문이 흘러 모두 살기를 띠었어요. “대나무를 내놔!”, “창을 내놔!”, 막대기 갖고 있는 놈은 칼로  끝을 뾰족하게 깎아서 모여온 사람들만으로 임시자경단을 만들어 주위를 강화했다. 그즈음 고구마가 계절이어서 고구마  이파리가 사람 얼굴로 보이기도 해서 그것을 찌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둑 위에서 빵빵빵 하는 총을 쏘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라카와 둑길 곁에는 한집 농가가 있었습니다만, 낮 시간을 지나서 7~8명의 조선인이 농가 주변에  도망와서는 자경단이나 근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붙잡혀 다짜고짜 두들겨 맞고 5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마구잡이 맞아서  살해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오키(가명) 그게 3일 낮이었었죠, 아라카와의 요츠기다리 아래쪽에 조선인을 몇 사람이나 묶어서 데리고 와서 자경단 사람들이 죽인  것은. 정말 무참하게 죽였지요. 일본도로 베거나 죽창으로 찌르거나 철봉으로 찔러 죽이거나 했습니다. 여자분, 안에는 배가  부른 분도 계셨는데 찔러 죽였습니다. 제가 본 건 30명 정도 죽이고 있었거든요. 아라카와역의 남쪽 둑이었어요. 죽이고  나서 소나무 땔나무를 가져와서 쌓아서 시체도 쌓아올려 석유를 뿌리고 태우고 있었습니다. 큰 구덩이를 파서 묻었죠. 둑길  바로 밑 정도였어요. <표2> 조선인학살 관련 구술자 증언 출전 : 『바람아 봉선화의 노래를 실어라』(1992년) ; 니시자키 마사오,「도쿄도 스미다구 야히로에 서의 추도 · 조사 활동」,『2013년 간토진재학술대회 자료집 』,  2013, 52-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