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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관동대지진과 조선총독부 27 지키는 자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총독부 당국자는 “만약 이것을 방치해 두어서는 반드시 자위단과 조 선인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 심상치 않는 사태의 원 인이 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전국에 자위단 의 해산을 명령했다. 총독부 관료들에게 관동대지진 에서의 조선인학살은 3·1운동에 비견될 만큼 커다란 식민통치의 위기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소위 ‘내선융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마루야 마 경무국장은 제회, 유민회, 국민협회, 대정친목회, 교풍회 등 12개의 친일단체가 참가한 각파유지연맹 을 결성시켜, 관동대지진 후의 반일감정을 완화시키 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재조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새 로운 단체를 출범시켜 그들을 통해서 조선인 유력자 를 포섭하면서 총독부와 보조를 맞추게 하였다. 총 독부는 1924년 4월 마루야마 경무국장의 주도 아래 식민지배에 협력하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일본의 ‘황 민화’를 모델로 내선융화를 목적으로 설립한 ‘동민회 (同民會)’가 대표적인 단체이다. 관동대지진은 조선총독부 관료에게 조선통치의 위기감을 가중시킨 커다란 계기였다. 사이토 총독의 개인 정치고문인 호소이 하지메(細井肇)는 1923 년 9 월 17일 등사한 『대일본제국의 확립과 조선통치방 침의 변경』이라는 의견서를 총독에 제출해서 “일시 동인(一視同仁), 내지연장(內地延長)은 주의가 아니라 궁극 이상입니다.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 뒤에 도 달할 수 있는, 혹은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궁극 의 이상입니다”라고 내지연장주의, 동화정책의 폐기 를 주장한다. 호소이는 도쿄의 오모리(大森)에서 조 선인으로 오인되어 살해당할 뻔한 체험도 있고 해 서, 9월 10일 내각서기관장 가바야마 스케히데(樺山 資英)에게 서한을 보내어 조선통치방침을 대변경하 여 대일본주의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관동대지진 당시 발생한 조선인학살은 조 선총독부 관료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을 뿐 아 니라, 식민지 조선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진재(震 災)처리를 둘러싸고 내각과 총독부 사이에는 적지 않은 불협화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친일단체 를 재편성하고 내선융화를 표방하는 단체를 조직하 여 민족 간의 감정 악화를 조금이라도 완화하려 하 였다. 또 조선인학살은 동화정책=내지연장주의에 대한 재검토를 촉진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 성주현 한양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연구소 연구교수, ‘1923 제노사이드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관동대지진 과  식민지 조선』(선인, 2020), 『근대전환기 서구문명의 수용과 민족운동』(선인, 2020), 『근대 신청년과 신문화운동』(모시는사람들, 201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