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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관동대지진과 조선총독부 23 일본에서 관동대지진 발생 직후 조 선총독부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 이 전개될 것을 경계하는 한편, 민 심 파악이라는 명목으로 ‘사찰’을  강화하였다. 또 조선인학살 소식의  전파를 막기 위해 언론을 통제하고  민심의 회유를 꾀하기도 했다. 관 동대지진 당시 발생한 조선인학살 은 총독부 관료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식민지 조선사 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진재(震 災)처리를 둘러싸고 내각과 총독부  사이에는 적지 않은 불협화음이 있 었지만, 이들은 친일단체를 재편성 하고 ‘내선융화’를 표방하는 단체를  조직하여 민족 간의 감정 악화를  완화하려 하였다. 조선인학살은 동 화정책, 곧 ‘내지(內地)연장주의’에  대한 재검토를 촉진시키는 한 계기 가 되었다. 조선총독부, 국내외 과격한 운동 경계 일본의 관동(關東)대지진 발생 당일, 그 소식은 조선에도 전해졌다. 1923년 9월 1일 오후 반경 조선호텔 연회석상에 있던 조선총독부 경무 국장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에게 무선통신으로 요코하마(橫濱)에 서 큰 불이 일어났다고 전달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관동대지진에 대 한 구체적인 사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날 밤 2시경 도 쿄(東京)에 대지진이 발생하였다는 전보를 받았다. 사이토(齋藤實) 총독 은 9월 1일 밤 10시 30분 일본의 지진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날이 밝자 마루야마 경무국장은 경무국에 전해진 소식들을 가지고 총독 관저로 가서 사이토 총독을 방문하였다. 관동대지진 소식을 접한 총독부는 곧바로 정보를 수집하기로 하는 한편, 구호시설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총독부는 대지진의 실황 조사를 위해 경무국 소속 구니도모 사무관, 문서과 구라하시 사무관, 그리고 체 신과 우에다 부사무관을 지진 현장으로 파견하였다. 이들로부터 수집 된 정보에 따라 구호에 관한 협의를 하고, 위문의연금 모금, 구호반 파 견, 이재조선인 구호, 위문품 수송 등 제반 사항을 정하기로 하였다. 관동대지진 소식을 알게 된 사이토 총독은 다음날인 9월 2일에 총독 부 주요 인사들과 식민지배에 협력하는 신석린, 민영기, 박기양, 이희 두, 송진우, 윤덕영, 이진호, 민대식 등을 만났다. 이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관동대지진에 대한 소식과 이에 따른 식민통치에 협조를 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날 마루야마 경무국장은 국경지역 및 경상남도지사에게 전 보를 보내는데, 그 내용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일본에 있는 조선인의 과격한 운동이 있을 경우 조선 내의 인심 동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경상남도에서 일본의 조선인들이 서로 연락하는 것을 엄중 단속할 것, 둘째는 그 연장선상에서 만주와 러시아 등 국경지대에서 민족운동 세 력과 연락하는 것을 엄중 경계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는 일본에서의 ‘조선인의 과격한 운동’ 즉 민족운동을 전개할 경우 식민지 조선과 국외 에서 호응할 것으로 3·1운동과 같은 대규모의 시위를 경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