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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94회) • 평택의 만세시위(1) 99 4월 1일 대규모 시위 4월 1일 밤 10시 경부터 병남면 평택역을 중심으 로 10리(4km) 내외에 있는 병남면과 부용면 일대에 서 수많은 화톳불이 밤하늘을 밝혔다. 화톳불이란 나무 줄기나 가지를 한데 모아 피운 불이다. 여기저 기 산과 언덕 위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밤하늘에 울 려퍼졌다. 이날 밤 십여 개 집단이 약 3,000명의 군중을 이 루어 평택으로 몰려와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본군 제20사단 보병 79연대 소속 군인 12명을 포함해 군 경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했으나, 시위 군중은 고분 고분 흩어지지 않았다. 군경이 발포하여 사망자 1명 을 포함해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튿날 새 벽 2시에 가서야 상황이 진정되었다. 『매일신보』 1919년 4월 5일자에서 “소요사건의 후보(後報), 경기도 진위, 네 명이 총살됨”이라는 제 목 하에 이날의 좀더 구체적인 상황을 보도했다. 4월 1일 밤 진위군 서면 부용면에서 떼를 지어 평택으로 향하고 오다가 안성천교 부근에서 소요 를 시작하였음으로 동군 병남면 송탄면 고덕면에 까지 차차 만연되었더라. 이번 소요사건이 일어남 을 따라 경계하기 위하여 당국에서는 밤에 출입함 을 금지하였더라. 4월2일 오후부터는 만일을 경계 하기 위하여 일본인 상점도 일제히 철시하였더라. 영국 외무성의 「한국상황」(Situation in Korea, 1919.5.5)이란 문서에는 평택상황이 좀더 구체적으 로 언급되고 있다. 4월 1일, 신궁리 평택, 많은 한국인들이 저녁에 모여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일본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김선’이라는 사람이 총에 맞아 숨졌다. 시 신은 한국인들에 의해 한국인 집으로 옮겨졌지만, 나중에 일부 일본인들이 와서 빼앗았고, 친척들의 반복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되찾을 수 없 었다. (계속)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일제시기 평택 시장의 모습 1920년대 평택 역전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