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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94회) • 평택의 만세시위(1) 97 않는 평야지대 평택의 모습을 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평택지역은 경기도와 충청도 사이에 서 이리 붙여졌다 저리 붙여졌다 했던 수도권의 변 방 땅이었다. 원래 고려시대 충청도 천안의 속현 이었다가 중간에 일시 경기도로 다시 붙여졌으나, 1914년 조선총독부가 지방행정구역 대개편을 할 때 까지 충청도에 남아 있었다. 아산만에 면해 있어 평 택지역에는 바다가 없는 인근 양성군, 직산군 등의 월경지가 있었다. 월경지는 자기 영역 내에서 자급 할 수 없는 생선, 소금 등의 공급을 위해 영역 밖에 둔 관할지였다. 이러한 변경의 땅 평택이 도약하게 된 것은 1905 년 1월 1일 경부선이 개통 교통 요지가 되었기 때문 이다. 1914년 일제의 전국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충 청남도 평택군 및 경기도 수원군의 일부가 진위군으 로 통합되어 현재의 평택시 영역이 진위군으로 확정 되었다. 이때 통복리 일부와 충남 평택군 일부를 합 하여 ‘평택리’라는 작은 역마을이 생겼다. 진위군청은 북면(현 진위면)에 두었다가, 1926년 지금의 평택역 이 있는 병남면으로 이전하였고, 그후 1931년 병남 면이 평택면으로, 1938년에는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개칭되었다. 평택리로 출발하여 24년 만에 평택군이 되었다. 변경의 땅은 자주성이 강하다. 평택의 만세시 위가 그것을 보여 준다. 3월11일 병남면 평택 역전 쌀장수의 첫시위 ‘내 비록 쌀장사로 먹고살고 있지만...’ 진위군 병남면 비전리 미곡상 이도상(李道相, 30 세)은 생각했다. 그는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다. 마침 내 평택에서도 3월 10일 평택구락부라는 데서 독립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시내 두 어 곳에 벽보가 나붙었다. 진위경찰서에서 즉각 경 계에 들어갔다. 누가 앞장 서기로 했다면 호응하고 따르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다음날인 3월 11일이 평택 장날이었다. 3월 10일 밤 이도상은 동생 이덕상에게 말했다. “내일, 평택 장날에 동지들과 조선 독립만세를 외 칠 계획이다. 내가 체포되면 늙은 어머니를 네가 잘 봉양해다오.” 3월 11일 오후 5시 평택구락부 회원들이 평택역 앞에 모였다. 그러나 선도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미곡상 이도상과 비전리의 같은 미곡상 동지 목준상 경부선 평택역 부근 철도평택 옛 진위군 청사(19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