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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약국민동맹회의 대표자로 이승만 · 민찬호 · 정한경 3명을 선출하였다. 뉴욕의 한인을 대표하는 김헌식 등은 소약국민동 맹회가 개최되기 전인 1918년 11월 중순 신한회(新 韓會)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신한회의 회장은 신성 구, 서기에 조병옥, 외무원에 김헌식 · 이원익 등으로 조직하였고, 소약국민동맹회의에 참여하기 위한 의 연금까지 모금하고 있었다. 1918년 11월 30일에 개 최된 신한회의 특별회에서는 12개 조항의 「 독립청원 서 」 를 채택하였다. 신한회의 「 독립청원서」 는 12월 3 일 김헌식과 신성구가 미국 국무부와 상원을 각각 방 문하여 전달을 시도했으나 거부당하자 파리에 가 있 던 랜싱(Robert Lansing) 국무부장관에게 직접 우송 되었다. 신한회의 독립청원 활동은 일본의 영자신문 과 『재팬 애드버타이저』 1918년 12월 15일자에 「 한 국인들 독립을 선동하다 」 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제2회 소약국민동맹회의는 1918년 12월 14일부 터 15일까지 뉴욕 맥알핀 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제2 회 대회의 주된 목표는 파리평화회의에서 소약국들 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신한회에서는 미국을 상대로 독립청원 운동 을 벌이면서도 소약국민동맹회의에 한인 대표로 참 가하였다. 김헌식은 신한회 외무원으로 인도 · 폴란 드 · 러시아 · 아일랜드 · 체코슬로바키아 · 라트비아의 대 표와 함께 소약국민동맹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소약국민동맹회의는 한국을 비롯 한 약소국 민족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국제회의였다. 한국의 독립 주장은 승전국 간의 화합과 협력이 강조 되던 당시 국제사회 분위기에서 크게 환영받지 못하 였지만, 한국 독립문제를 국제회의에서 제기하였다 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뉴욕에 조직된 한인단체들 정미조약 이후 1907년 7월 25일 뉴욕에서 안정 수 · 신성구 · 서필순 · 이원익 · 차두환 · 안규선 등 유학생 과 황용성 · 김승제 · 양흥빈 · 송헌길 · 윤석규 등 구한국 관리출신들이 동족상조 ·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공제 회(共濟會)를 결성하였다. 공제회는 창립 직후인 8월 1일 헤이그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고 뉴욕에 도착한 이상설과 이위종을 맞이하였다. 공제회가 만들어진 이후 뉴욕에는 한인단체가 만 들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3 · 1운동 소식이 전해진 직후 뉴욕의 한인들은 1919년 3월 17일 대한 인국민회 뉴욕지방회를 설립하였다. 뉴욕지방회의 초대 회장은 천세헌, 부회장은 이봉수, 총무는 장수 영, 서기 겸 재무는 박호빈 등이 선출되었다. 3 · 1운동 당시에는 뉴욕지방회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 지만 곧 활동이 부진하여 해산하였다가, 1927년 2월 22일 다시 복설되었다. 복설된 뉴욕지방회도 활동이 없어 해산되었다가, 1935년 5월 23일에 복설되었다. 1920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 임시교민단제 」 가 공포된 이후, 1921년 3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 방총회가 ‘대한인하와이 교민단’으로 개편되었다. 그 리고 1924년 12월 10일 뉴욕에서 안정수 · 홍득수 · 이 봉수 · 송세인 · 신성구 · 허정 · 이진일 등이 뉴욕 한인교 민단을 결성하였다. 뉴욕 교민단은 이승만과 구미위 원부를 지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뉴욕에서는 국 민회를 지지하는 세력과 이승만을 후원하는 교민단 간의 알력이 있었다. 그러나 1926년 3 · 1절에는 뉴욕 국민회와 교민단의 회원 80~90명이 뉴욕 대한인기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 미국 최대의 도시 뉴욕에서 한국의 독립을 외치다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