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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023년 8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김동하 그룹 사이에 논전이 일어났다. 이들은 ‘무산 자사(無産者社)’의 해체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전개된 논쟁의 요지를 보면, 무산자사의 해체를 주 장하는 쪽은 “재일조선노동총동맹이 코민테른의 일 국일당주의 원칙에 따라서 해체된 오늘에 있어 일 본에서 조선인들만의 집단을 결성하여 일본 좌익단 체와는 물론 보석상태에 있는 조선의 전위들과도 연 락하지 않으면서, 더욱이 무산자 청년의 무산자신문 배포망에도 들어가려 하지 않고 독자반 조직을 따로 계획하는 것은 반동적이다”고 했다. 무산자사에서 활동하던 김두용은 프로문학자로서 의 예술운동론을 견지했다. 그의 첫 공격 대상은 김 기진(金基鎭)이었다. 김두용은 김기진의 예술운동론 을 합법적 영역에서의 작품 활동만을 주장했다면서 예술운동의 정치적 성격을 강조했다. 그는 참다운 프 롤레타리아트의 격정을 짜는 참다운 프롤레타리아 트의 예술이 생산되었다고 할지라도 정치적 자유를 빼앗긴 상태에서 그것이 얼마나 프롤레타리아 대중 에게 퍼질 수 있는지 의 문 이 라 면서 정치 투쟁을 역 설했다. 이 렇 게 김 두 용 의 예 술 운 동 론은 ‘비합 법적 정치 투쟁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동지사와 동경예술좌에서의 활동 김두용은 무산자사에서 활동하다가 검거를 피해 1931년 11월 동지사(同志社)를 결성했다. 여기에는 김두용을 비롯하여 박정석, 이북만 등과 조선프롤레 타리아 예술동맹 동경지부 구성원, 동경조선프롤레 타리아 연극연구회원,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참 여했다. 강령은 정당한 마르크스주의적 예술이론을 가지고 기술을 수련하는 연구집단인 일본프롤레타 리아 문학연맹과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을 적 극적으로 지원 · 지지하고, 확대 강화를 위해 투쟁한 다고 하면서, 조선과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 연구 의 지원과 조직의 강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조직의 임무는 재일본 조선 노동자와 농민 사이에서 의 예술운동과 조선 국내 예술운동의 원조라고 규정 했다. 조직된 동지사는 조직 내에 작가, 연극, 영화, 음악, 1945년 해방 직후 지바현(千葉県 )에서 개교한 조선국민학교. 이 때 일 본에 있던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바라고 있었는 데, 일본어밖에 모르는 자녀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많은 학교 를 세워 운영하였다. 김두용의 저서 『조선근대사회사화』 (鄕土書房, 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