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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독립운동가 • 윤준희 · 임국정 · 한상호 · 김강 지사 67 청진지방법원에서 세 청년과 전홍섭에 대한 첫 번 째 재판이 진행됐다. 1심에서 임국정과 윤준희는 사 형, 한상호는 무기징역, 전홍섭은 징역 1년을 선고받 았다. 이어진 2심과 3심은 서울의 경성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진행되었다. 1921년 4월 4일 고등법 원 최종심에서 윤준희와 임국정, 한상호 3인에게 사 형, 전홍섭에게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윤준희와 임 국정, 한상호 세 청년은 1921년 8월 25일 서대문형 무소에서 사형으로 순국했다. ‘간도 15만원 사건’의 ‘연루자’, 김강 1920년 만주로 군대를 출병한 일본군은 이른바 ‘간도 15만원 사건’의 연루자라는 명목 아래 한인 독 립운동가들을 살해했다. 1912년 만주지역으로 망명 하여 활동해 온 김강도 이러한 이유로 일본군에 피 살 순국했다. 김강은 평양의 숭실학교에 재학하던 중, ‘105인 사 건’에 관련되어 검거될 위험에 처하자, 1912년 중국 북간도 지역으로 망명했다. 하얼빈으로 이동해 한 인 청년들을 규합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 썼 다. 1913년 간민회(墾民會)가 조직되자, 그는 용정으 로 돌아와 간민회 일본조사부원(日本調査部員)으로 활동하는 한편, 동제회(同濟會) 평의원과 대동협신회 (大同協新會) 회원 등으로 활동했다. 1919년 3 · 1운동이 발발하자, 그해 11월 연길현 춘양향(春陽鄕)에서 북간도 지역 대표들이 대한국민 회를 조직했다. 이에 참여했다. 김강은 대한국민회 통신부 부원과 연길현 상의향(尙義鄕) 태평구(太平 溝)에 근거를 두고 있던 제1중부지방회의 중부경호 부장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 협력자들을 처단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1919년 11월 정식으로 출 범한 ‘간도청년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청년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1920년 11월 13 일 연길현 태평구 용포동(龍浦洞) 부근에서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카노(加納) 기병연대 에 이른바 ‘간도 15만원 사건’ 연루자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안타깝게도 중국 연길현 동불사(銅佛寺) 북구(北溝)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현장 부근에 세워진 ‘15만원 탈취사건 유지’ 기념비(독립기념관  제공) 2017년 새로 세워진 유적지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