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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2023년 8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향기나는 삶 이야기 의 다급한 망명동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참으로 생생한 증언이다. 전해듣기로는 할머님께서 박경주 이사를 키우셨다 고 한다. 성장하면서 겪은 어려움, 조부님의 독립운동 이나 가정의 어려운 형편이 박이사께 끼친 영향, 조부 의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 등을 계속해서 들어보았다.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감이 저의 인생에 많은 영향 을 끼친 것이 사실입니다. 표현으로 다할 수 없는 어 려움 속에서도 할아버지의 흔적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으로 손해와 이익의 갈림길에서 거의 대 부분 양보할 수밖에 없는 삶을 미련스럽게 살았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도덕의 노예(?)였음을 이제는 조금 씩 후회하고 있습니다. 결혼 이후 건설업에 종사하면 서 가난극복을 위해 3년 넘게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 서도, 맡은 공사를 준공할 수 있던 일이 있어요. 그런 일도 할아버지에 대한 자존심으로, 인내의 한계를 넘 는 동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모자챙에 눈만 위로 뜨면 볼 수 있도록 ‘인내’, ‘성실’ 두 단어를 쓰고 작업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듣고보니 정말 치열하게 살아오셨구나! 하는 생각 이 절로 들었다. 70여년의 짧지 않은 인생을 살 아오 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할아버지, 순국선열에 대 한 의무감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 서 체험한 귀중한 경험, 가치관이라 생각되었다. 순국선열 발굴과 예우 등 국가보훈부의 올바른 역할 중요 박이사의 조부인 박문용 선생은 1980년 독립유공 자로 공인, 선정되어 정부에서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심사나 포상 신청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는지 질문했다. “할아버님께서 망명 준비중에 자신의 흔적을 지우 기 위한 일환으로, 사진 등 자료가 될만한 것들은 모 두 태우고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이유로, 전해지는 유품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또 아버님이 1961년 저 의 나이 8살 때 일찍 작고하셨고, 삼촌께서도 1930년 6.25사변시 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시다 전사하셨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들들의 이른 사망으로 할아버님 공적을 추모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특히 아버님의 성품이 유달리 완고하셨던 것 같아요.” 순국선열유족회 임원들의 홍석준 의원 기자회견장에서(좌측 4번 째, 2023.7.6)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 휴게소에 있는 박문용 기적비(紀蹟碑 ),  (전남동부보훈지청 제공). 김구는 1898년 인천감옥 탈옥 후 쇠실 마을에 40여일 동안 머물렀다. 때문에 두사람은 친밀한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