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page

향기나는 삶 이야기 • 박경주 순국선열유족회 이사 59 그 리 고 같 은 해 인 1911년 12월 서둘러 임 종순 여사와 결혼했다고 한다. “1913년 12월 당 시 조선인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 았던 겸백면장직을 버리 고, 부모형제와의 안락 한 생활, 신혼의 단꿈을 접고 중국 망명길에 오 릅니다. 이 과정은 당시 의병활동 등 보성의 항일정 세를 참고하면 좀더 깊은 사연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 다.” 박이사의 조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은 어릴 때부 터 수원에서 함께 생활했던 할머니 임종순 여사에게 전해들은 이야기가 많다고 한다. 이듬해인 1914년 부친(박태장, 朴泰璋)이 태어났다고 한다. 가장이 없 으니 가정 형편이 어떨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조부 박문용의 독립운동과 순국, 집안 형편 박문용 선생은 1920년 일경에 붙잡혀 재판을 받 고, 1921년 11월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출 옥한 지 얼마되지 않은 1929년 7월 20일 돌아가셨 다. 이에 관해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알아보았 다. 그리고 조부님 망명 이후 부모의 생활은 어땠는 지. 또 조부 관련 기록이나 자료가 거의 없는데 왜 그 럴까 그 까닭을 물었다. “할아버님이 출옥후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상 당히 힘든 생활을 하셨답니다. 할머님이 간병하시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도 할아버 님께서는 동네 학동들에게 신문학을 교육하신 것으 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박이사는 박문용 선생의 활동과 할머 니 의 증언을 소개한다. “특파원 임무를 띠고 경성(서울)에 들어오신 할아 버님께서는 고향에 계시던 할머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셔서 특파원의 임무를 이어가셨고, 조선독립 군사령부 창설에 몰두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일 환으로 결사대를 조직하고 할아버님이 모금행동에 도 직접 참여하셨죠. 또 미국의원단 경성 방문 정보 를 확보하고 사이토총독 및 이완용 · 송병준등의 암살 계획시, 한훈(한우석)선생님 가족들과 정동 근처에서 같은 여관에 기거하셨다고 해요.” “뒷날 할머니께서는 팔십이 넘은 연세에도 한훈 선 생의 아들 이름(광석이라고 기억하심)과 할아버지께 서 늘 ‘우리 훈이’, ‘우리 훈이’라고 했던 일을 할머니가 분명히 기억하는 것으로, 두 분 관계가 각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훈 선생은 할아버지보다 8세가 어린 분이지요. 직계 상위조직인 임시정부의 기반을 참고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더불어 한훈 선생의 의병 활동과(활동영역이 주로 전라남북도 였음) 할아버지 조부의 훈장증을 앞에두고(박이사, 할머니 임종순,  조철환, 1990년) 인터뷰중인 박경주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