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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윤희순 선생 55 마을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에게 항일선전을 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항일운동단체에 전달하였다. 1912년 초에는 환인현 팔리전 자진 취리두 남산(南山)으로 이주하여 항일운 동을 전개하였다. 윤희순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항일 인 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이 회영, 우병렬, 우병렬의 부인 채인산, 중국인 도원훈과 손홍령의 도움으로 환인현 보락보 진 남괴마자에 민족학교로 유명한 동창학교 (東昌學校) 분교인 노학당(老學堂)을 창립하 였다. 학교운영자금은 윤희순과 학생들이 환 인지역의 조선인, 중국인들에게서 모금한 것 으로 충당하였다. 윤희순은 몇 십리 길을 걸어다니면서 학교 운영에 사용할 자금을 모집했다. 그리고 이 웃들에게는 항일애국노래를 가르쳐주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15년까지 김경도, 박종수, 이정헌, 마덕창 등을 비롯한 50여 명 의 독립운도 인재를 양성할 수 있었다. 그러 나 1915년 일제의 간섭으로 노학당은 폐교 되고 말았다.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연대단체인 무순 조선독립단 조직 매우 어려운 생활 가운데 1913년 시아버 지 유홍석이, 1915년에는 남편 유제원마저 세상을 떠났다. 가족을 잃고 노학당까지 폐 교당한 이곳에 더 이상 남산에 거주할 수 없 었던 윤희순은 1915년 막내 아들 교상을 데 리고 환인현을 떠나 무순(撫順) 포가둔(包家 屯)으로 이주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윤희순은 조선독립단과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를 조직 하고,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하였다. 조선독립단은 그녀의 뒷받침 아래 아들 유 돈상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윤희순과 유돈 상은 항일선전을 강화하여 중국인들을 각성 시켜 연합투쟁을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 하고 조선독립단을 한·중 연합으로 조직하 였다. 180여 명의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동지 로 모집하였다. 조선독립단 학생들은 낮에는 농사일, 밤에는 무순 포가둔 북산 마을 뒷산 에 올라가 군사훈련을 하였다. 이 지역 주민 들은 “그 때 우리는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를 무서워했습니다. 밤중에 산에서 총소리가 난 적도 있었습니다. 윤할머니는 이따금 우리 중국 사람을 찾아와서 같이 일본놈을 쳐부수 자고 선전하였습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윤희순은 1930년대 초 생활고를 겪으며 중국인 집과 친척 집을 돌며 피신하다 해성 현(海城縣) 묘관둔(苗官屯)으로 이사했다. 아 들 유돈상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장인 음성국(陰成國)과 함께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그 후 혹독한 고문을 받 고 풀려났으나, 집에 돌아오던 중 윤희순의 품 안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아 들 유돈상이 숨진지 11일 만인 1935년 8월 1 일 윤희순도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