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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2023년 8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이후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은 중국으로 먼저 떠났다. 윤희순은 가산을 정리한 다음 가족 을 데리고 뒤따라갔다. 윤희순은 여성의병단 조직, 탄약제조소 운 영 등의 적극적 의병운동 지원에 힘썼을 뿐 아니라,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제 작하며 구국활동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많은 여성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도록 ‘안사람 의병가’, ‘안사람 의병 노래’ 등을 지어 여성 들도 구국활동의 중 심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녀는 일기에서 의병을 돕는 일도 고 생스러웠지만, 의병 가, 경고문 등을 가사 로 지어 노래 부르도 록 하는 것이 더 어려 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남 자들이 모르게 하느라 근심이 더 많았다고 밝 혔다. 그는 밤낮없이 자신이 지은 의병가와 경고문을 불러 자녀들, 마을 청년들, 새댁들 이 모두 의병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각 하기를 원했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덧 윤희순 이 지은 가사를 자신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되었다. 그녀의 이러한 노래 부르기 전략은 많은 사람들을 의병운동에 참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으로 망명, 노학당을 설립하여 항일인 재양성에 나서다 윤희순은 1911년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 를 따라 아들 돈상, 민상(敏相), 교상(敎相) 등 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때부터 1935년까지 25년 동안 가족들과 함께 중국 요동지구를 떠돌아다니며 항일투쟁을 전개 하였다. 유홍석의 재종제(6촌 아우)인 의병장 유인석은 1911년 유씨네 처갓집, 친척, 부하, 문인, 제자, 친구들 모두 40 ~ 50가구를 중국 요녕성 신빈현 평정산 난천자 고려구(高麗溝) 로 이사시켰는데, 윤희순 역시 의병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였다. 시아버지 유홍석은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그녀에게 맡기고 독립 운동에 나섰다. 서간도 지역의 관전(寬甸), 환 인(桓仁), 봉성(鳳城) 등지에서 유인석을 지도 자(의병대장)로 추대하고 아들과 함께 항일 투쟁 조직에 전념하였다.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면서도 그녀는 이웃 춘천에 세워진 윤희순 동상 윤희순이 1912년 서간도 환인현에 세운 노학당 유지비(경향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