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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전해산 의병장 51 광주의 대명동천(大明洞天)은 무기제조 장 소로 자주 활용되었다. 영사재(永思齋)는 나 주 오씨의 제각인데, 그곳도 의병의 주둔지 와 무기를 제작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용진 동천 역시 전해산 뿐만 아니라 조경환 및 오 성술 의병부대의 일본 군경과의 전투지였다. 전해산 의병부대는 주민 보호에 앞장서서 군 수품을 조달할 때에는 가능한 그 대가를 지 불하였다. 가의(假義, 가짜 의병)의 퇴치, 헌병 보조원의 만행, 세무관리의 행패, 일진회원의 비행 등으로부터 주민들을 적극 보호함으로 써 신뢰를 얻었다. 또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투쟁역량을 강화 하였으며, 무기의 조달과 개조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때로는 선교사와 만나 신무기 구 입에도 노력하였다. 전투가 없는 날에는 나 주의 오준선, 함평의 김돈(金燉), 장성의 기우 만(奇宇萬) 등을 방문하여 의병 투쟁방략을 의논하기도 했다.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하다가 일 본 헌병에 피체 순국 투쟁역량이 한결 강화된 대동창의단은 전 남의 서부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반일투 쟁을 비롯한 친일세력의 제거 그리고 항세 (抗稅)투쟁 등을 주도하였다. 일본군경을 상 대로 영광의 불갑산, 광주의 대치, 자은동 전 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자은동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 군경은 그 보복으로 마을에 불 을 질러 약 100여 호의 민가가 피해를 입었 다. 연합항쟁의 필요성을 절감한 전남지역 11개의 의병부대들이 참여하여 1908년 말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을 결성하였다. 호남동의단은 전해산을 비롯하여 제1진 의병장 심남일(沈南一)에서 제10진 의병장 안규홍(安圭洪)에 이르기까지 당시 전남 지역 의 대표적인 의병부대가 참여하였다. 그런데 1908년 12월 나주 고막원 전투에서 해산군 인 출신 선봉장 정원집이 중상을 입은 후 결 국 순국하였다. 이때부터 전해산의 의병활동 이 위축되기 시작하여 1909년 4월 하순 영광 오동치 및 덕흥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결국 1909년 12월 18일 변절자 김현규(金 顯圭) 등의 밀고로 영산포헌병대에 체포되었 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에서는 그를 “공평정 직하고 일호(一毫)도 사사 뜻이 없는 진실한 의사”라고 평하였다. 심문과정에서도 자신은 “폭도가 아니라 의병”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정당성을 적극 피력하였다. 1910년 8월 20 일 사형이 확정된 후 같은 달 23일(음력 7월 18일) 동지 박영근과 함께 대구감옥에서 교 수형으로 순국했다. 부인 김해 김씨는 시부 모의 장례를 치른 후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 하였다. 일제는 그를 심남일(沈南一) · 안규홍 (安圭洪)과 더불어 전남에서 활동한 3대 의병 장으로 평가하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