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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전해산 의병장 49 면암 최익현 의병항쟁에 영향, 창의동맹단 참모로 의병대열 합류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부터 의병을 일으킬 생각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실 행할 수 없었다. 이후 명망이 높았던 송병선 (宋秉璿)과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을 전북 임피의 낙영당(樂英堂)에서 만나 깊은 감명 을 받았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될 위기에 처 하자, 1906년 6월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최익현과 임병찬(林炳瓚)이 의병을 일으킬 때 참여하였다. 하지만 군사활동에 취약한 유생 군(儒生軍)이 대다수여서 순창에서 패배한 후 의병부대는 해산되었다. 그후 전북의 의열지사로 알려진 임실 출 신의 이석용(李錫庸)이 1907년 9월(음력) 진 안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소(湖 南倡義所)를 결성하였다. 이 소식을 접하자, 1908년 1월(음력) 전북 남원에 주둔 중인 이석용 을 만나 그 의병부대에 투 신하여 참모[參謀, 혹은 종 사(從事)]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8년 3월(음 력) 이들은 남원 사촌전투 에서 크게 패배하여 의병 부대를 해산할 상황에 내 몰렸다. 마침 전남에서는 의병항쟁이 크게 고조되 어 의병장 기삼연(奇參衍) 등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가 눈부신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이석용과 상 의하여 전남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활동하는 의병부대에 투신하기로 하였고, 이석용은 전 북에 남아 다시 장기항전에 대비하기로 하였 다. 그러나 전남 장성에 도착하였을 때 만나 고자 하였던 김준 역시 일제 군경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1908년 4월(음력) 나주의 용진산에서 김준 의병부대의 핵심인물이었던 조경환(曺 京煥) 및 오성술(吳成述)과 만나 의병항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흩어진 의병을 수습 하여 의병부대를 재편하면서 조경환을 의병 장으로 추대하여 의병항쟁을 계속하였다. 1908년 7월 27일(음력) 조경환 의병부대에 서 독립하여 독 자적인 의병부 대를 결성하여 전해산 의병장의 모습(1907년) 전해산 의병장이 쓴 8폭 병풍용 묵서(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