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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023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78주년 특집 일제 말기 상황과 국내외 한국인의 대응  상과 달리,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자 일제는 1934년 제1차 이민회의를 개최하여 농 업이민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이민정책에 대한 전반 적인 재검토에 들어갔다. 1935년 7월 만주척식주식 회사와 만주이민협회를 통해 10개년 100만호 500 만 명 일본인 이주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일본인 이민은 ‘이주비’의 과다 계상으로 재정적 부담이 가 중할 것이라는 반대여론을 뒤로하고 추진되었다. 만 주국에서 대화민족이 식민통치의 핵심으로 자리 잡 고 피압박 민족의 항일역량을 제어하기 위해서 일본 인의 대량 이민은 절대적이라는 인식이 투영된 계획 이었지만 1937년부터 1941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실질적인 일본인 이주 호수는 42,000여 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1933년부터 추진되었던 한인 집단부 락 설치는 북간도(현재 중국 연변) 지역을 중심으로 탄력을 받아 진행되었다. ‘안전농촌’의 설치가 강제 성의 초기단계라면 집단부락은 본격적 궤도에 들어 섰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 이주민에게 만주국은 유 리한 경작환경을 제공하는 반면 이주한인에게는 황 무지 또는 범람지 등 열악한 환경이 제공되었다. 한 인의 강제 이주는 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 다. 중일전쟁이 가속화 되면서 일제는 북간도와 북 만주 및 내몽고 개척에 전력하였으며, 만선척식회사 는 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한인들은 당시 만선 척식회사가 설립한 농장에 강제 수용되어 생활하였 으며, 이곳은 기 정착민인 한족들의 거주지였으나 일제가 강제로 경작지를 몰수하여 분배한 곳이다. 일제로서는 한인을 갈등의 전면에 내세우는 한편 개 척의 선봉이라는 측면 역시 강조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의 메카, 만주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한국의 애국지사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전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들의 활동 무대 가운데 가장 치열하 게 일제와 싸웠던 곳이 바로 중국 동북지역 이른바 만주지역이다. 한국독립운동의 시간과 공간의 역사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형성된 북간도(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 남도촌 전경. 호남지역 출 신 이주민 마을이다. 조선총독부 간행 『조선인 집단부락의 전 망』 도서. 1930년대 만주지역 조선인 집 단부락 시찰기이다.(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