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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3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78주년 특집 일제 말기 상황과 국내외 한국인의 대응  두 작업 현장으로 간 것도 아니었다. 이들 가운데 일 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에도 일제는 계속 징용장 을 발동했으나 징용장을 받고 가족 전체가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징용을 간 후에는 어떠했을까. 징용 현장 에서도 순응하지 않았다. 일본 경찰이 보고한 내용을 보면, 재일조선인은 병원이든 합숙소 화장실이든 기 회만 있으면 탈출했다. “도주자는 5,6일 전부터 오른쪽 발바닥에 종기가 생겨 미하시(三橋) 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받던 중 4월 12일 오전 8시 반경 미하시 병원에서 화장실에 간다 고 한 뒤 뒷문으로 도주” - 효고현 출신 천안고일(川 岸庫一)의 사례 “함바(*노무자 합숙소)의 변소 창문을 뜯고 도주하 여 즉시 4,5명이 추적했으나, 함바 남쪽 수풀 속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 충북 출신 한인 금본삼랑(金本 三郞) 사례 이러한 탈출 사례는 일본 경찰 문서에서 무수히 볼 수 있다. 또한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國) 자료인 『특고월 보(特高月報)』와 『사회운동의 상황』에 따르면, 1939 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에서 조선인들은 총 2 ,554 건의 노동운동을 일으켰는데, 그 가운데 재일조선인 들이 벌인 파업과 태업은 770건이었다. 비밀결사도 재일조선인의 적극적 투쟁 방법 가운 데 하나였다. 오사카에서 김권일(金權一)은 1938년 이후 몇몇 법랑(琺瑯)공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 들을 중심으로 『조선문제』라는 교재를 읽는 공산주 의운동연구회를 만들고 동지를 모아 조선독립청년 단을 조직했다. 이들의 활동은 1940년에 발각되어 총 13명이 검거되었다. 1942년에 고베(神戶)의 신동 하(辛東夏) 등 4명은 조선인민족주의그룹을 만들어 조선독립을 위한 봉기를 목표로 계몽운동을 전개했 으며, 1943년에는 오사카의 김상래(金尙來) 등 6명 이 민족주의 그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협의하다가 4명이 검거되었다. 1944년에 들어서면 이러한 움직 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일본의 패망을 확신한 재일조선인들은 교토(京都) 나 홋카이도(北海道), 나고야(名古屋) 등지에서 다양 한 비밀결사를 결성해 각 노무자 합숙소를 순회하며 조국재건을 협의했다. 그렇게 재일조선인들은 엄혹 한 총동원체제기에도 포기하지 않고 해방의 여명을 만들어갔다. 필자 정혜경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특별연구원,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조사과장, 서울대 강사, 한일민족문제힉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 다.  『일제시기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연구』(2001), 『일본제국과 조선인 노무자 공출』(2011), 『항일과 친일의 재일코리안운동』(2021), 『조선 민중이 체험한 ‘징용’』(2021)  등  다수 논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