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page

순국 역사기행 • 중국 관내지역 독립운동, 그 현장을 가다 ③ 103 돕는다. 조선의용대를 조직한 것 이 그랬다. 김성숙과 장지락은 중산대학으로 님 웨일스의 『아리랑』으로 국 내에 알려지고 내가 『김산평전』 으로 쓴 장지락은 상하이(上海)시 절부터 정신적 멘토로 여겼던 의 열단 동지 김성숙과 동지적 우정 을 쌓으며 국립광동대학 의학과 에 편입했다. 장지락은 베이징의 협화의학원에 다닌 터였다. 김성 숙은 베이징 민국대학 법학과에 다닌 터라 그대로 편입했다. 장지 락은 곧 황포군관학교 강의를 맡 게 되어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법 학과로 바꾸었다. 1926년 광저우에는 조선 청년 700~800명이 있었다. 만주 독립 군 출신이 400여 명, 국내에서 온 사회주의 계열 청년 100여 명, 러 시아 연해주에서 국제간섭전쟁 에 나선 일본군과 싸운 파르티잔 100여 명, 소련 군사고문단을 따 라온 30여 명 등이었다. 그들은 유월(留粤 )한인청년동지회를 결 성하고 결속을 다졌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간은 길지 않았다. 북벌전쟁에 나서 군벌들 을 굴복시키며 북진하던 장개석 이 돌연 태도를 바꿔 쿠데타를 일 으켰다. 상하이에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학살한다는 소식이 들 려왔다. 김원봉을 도와 광저우의 의열단원들을 이끌던 김성숙·오 성륜·장지락은 이에 격분, 동지들 과 함께 공산주의 진영에 합류해 투쟁했다. 그것이 광저우 봉기 참 여였다. 이준 열사의 아들 이영(李 瑛, 본명 李鏞), 장일진(張日鎭), 박 진(朴鎭, 본명 朴根成), 그의 아우 박근만(朴根萬), 박근수(朴根洙) 등 이 가까운 동지였다. 700여 명의 한인 청년들 중 200여 명이 광저 우 봉기에 참여했으나 국민당 군 대의 공격으로 3일천하로 끝났다. 광저우 동쪽의 소비에트 형성까 지 묶어 ‘광동코뮌’이라고 한다. 중조인민혈의정과 한인 생도 묘비 한인 청년들 150명 이상이 희 생되었다. 중국 정부는 그들의 희 생을 소중히 여겨 기념비를 세워 주었다. 그것이 ‘중조인민혈의정 (中朝人民血誼亭)’ 정자와 기념비 이다. 이 정자와 비석 말고 가슴을 아 프게 하는 곳은 황포군관학교 구 지(舊址)에 있는 동정열사묘원(東 征烈士墓園)에 묻힌 66명의 생도 희생자 묘비이다. 여기 우리 한인 청년 둘이 묻혀 있다. 평북 정주 출신 김근제(金根濟) 생도와, 충 북 괴산 출신 안태(安泰)생도이다. 정변이 없어 무관학교를 졸업하 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했으면 독 립전쟁 전선에서 초급지휘관으로 광동코뮌에서 희생된 150여 명의 한인 청년들을 추모하는 중조인민혈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