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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2023년 8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내려갔다. 좌파 지도자로서 국공 합작을 주도한 료중개(廖仲愷)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국민당에 입 당하여 중앙조직부장을 맡고 있 는 담평산(譚平山)과 면담했다. “일본은 장차 중국을 침공할 것 이고 우리 한인들은 중국 편에 서 서 싸울 것입니다. 의열단을 도와 주십시오. 장차 중국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료중개와 담평산은 의열단이 상 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군 대 장에게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쏘 고 거리를 내달리며, 일본영사관 감방을 탈출한 사건을 잘 알고 있 었다. 최근 광저우 앞바다에 있는 섬 장주도에서 개교한 황포군관학 교(공식명칭 중앙군관학교)에 입 교 주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리하여 의열단원들을 비롯한 한 인청년들의 입교 길이 열렸다. 1926년 3월 8일, 김원봉은 29 세의 나이에 황포군관학교에 4 기생으로 입학했다. 박효삼(朴孝 三) · 이영준(李英駿) · 이춘암(李春 岩) · 이집중(李集中) 등 동지들이 그를 따랐다. 후배 기수들까지 한 인 입학생은 총 24명이었다. 김성 숙(金星淑)과 뒷날 가명 김산(金 山)으로 알려진 장지락(張志樂) 등 주요 인물과 나머지 단원들은 국 립광동대학에 입학했다. 이 대학 은 곧 중산대학(中山大學)으로 이 름을 바꿨다. 황포군관학교에는 동포 교관들 도 있었다. 청산리전투에 참여해 백운평 매복작전 때 소대장 으로 서 공격정면을 맡았던 양림(楊林, 본명 김훈金勳), 1922년 의열단원 으로서 상하이서 황포탄 의거를 감행했던 오성륜(吳成崙), 뒷날 만 주에서 김일성과 더불어 동북항 일연군 간부로 활동한 최용건(崔 庸健), 의열단원이었다가 조선의 용대 간부로 투쟁한 박효삼, 이빈 (李彬), 양달부(梁達夫), 채원개(蔡 元凱) 등이었다. 김원봉은 생도생활 중 등걸(滕 傑)과 우정을 쌓았다. 그는 뒷날 국민당 첩보조직인 삼민주의역행 사(三民主義力行社), 일명 남의사 (藍衣社)의 서기가 되어 김원봉을 생도복 입은 김원봉. ‘최림’이란 가명으로 입교 했다. 구 황포군관학교(정식 명칭은 중앙육군군관학교) 교문과 행진하는 생도들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