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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3년 8월 Column    명사 컬럼 작은 소리 큰 울림  안타까운 작사 · 작곡자 5인의 운명 해방을 기념하 는 노래를 작사 · 작 곡했다는 것은 개 인적으로 큰 영예 이면서 보람이다. 그러면, 영예스런 작사자들과 작곡 가들의 운명은 이 후 어찌 되었을까? 임화·김순남·박 태원은 해방 3년의 기간에 월북했으며, 임화와 박태 원은 6 · 25전쟁 때 종군기자로 내려왔다가 패퇴하는 북한군을 따라 다시 월북했다. 박태원의 아내는 전 쟁기에 남한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가 월북하지 않은 (또는 월북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 국정부에 의해 투옥됐고 그들 사이의 아들은 한국정 부의 여러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 결국 어렵게 미국 으로 이주했다. 임화는 휴전 직전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출신을 숙청하기 위한 김일성정권 주도의 남 로당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가 휴전 직후 45세의 나 이로 처형됐다. 김순남은 북한의 제1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국비로 모스크바의 차이콥스키음 악원으로 유학할 수 있었으며 소련의 정상급 피아니 스트들로부터 격찬을 받았고 김일성대학 교수로 활 동했다. 그러나 그 역시 남로당 전력으로 숙청되어 함경도에서 노동자로 살았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사 면됐으나 천재적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더 이상 발휘 하지 못한 채 어려움 속에 69세로 별세했다. 박태원 은 집단농장으로 숙청되어 가난하게 살았으나 비교 적 덜 비참했다. 만년에 실명한 상태에서도 북에서 재혼한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동학혁명(북한이 즐겨 쓰는 명칭으로는 갑오농민전쟁)을 기리는 『계명산천 은 밝아오느냐』라는 대작을 비록 구술의 형태로나마 남길 수 있었고, 77세까지 살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일제강점기에 비타협주의 노선 아 래 지조를 지켰으며 당대의 최고 석학으로 꼽히던 정 인보 선생은 6 · 25 전쟁기에 납북됐고 결국 북에서 57세로 세상과 하직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훗날 그에 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한다. 윤용하는 월북하지 도 납북되지도 않았고 이승만 대통령을 칭송하는 노 래를 작곡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박화목(朴和穆) 작사 의 「보리밭」을 작곡하기도 했으나, 1950년대 말 이후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극빈 속에 남산의 토굴 같 은 곳에서 살다가 43세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훗날 그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수여한다. 그리고 정인 김성태(1910~2012) 박태원 작사 김성태 작곡 ‘독립행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