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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⑤ 95 찰하면 북으로 송화강에 걸치고 남으로 함경 · 평안 2 도를 차지하였으며, 동으로 일본해에 이르렀고 서로 요하를 건너서 과이심(科爾沁)에 도달하였으니 광폭 이 5천 리로 동방 최대의 나라였다. 대개, 그 의리를 확고히 지키고 정대하게 왕업을 일으킨 사적은 중화와 외방의 역사를 통틀어 구한다 하더라도 그 예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가 들은 다만 신라만을 알고 발해를 알지 못하여 마침내 3천년 조국의 후신을 먼 이역 오랑캐의 반열에 떠밀 어 넣고 끝내 국내의 역사기록에 단 한 글자도 전해 지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평한 의리를 주장한 신필(信筆)이라 하겠는가? 나의 어리석은 식 견으로는 오직 고구려의 왕통은 마땅히 발해를 적전 (嫡傳)으로 삼아야 하며, 신라 · 백제 · 가락은 삼한의 뒤 를 이은 하나의 계파라고 한 후에야 우리나라 역사가 마침내 바른 데로 귀착하리라 본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석주는 망명 생활 중에 숙 신사, 부여사, 본국사, 고구려사, 신라사, 발해사 등을 읽었다. 이제 석주가 보여준 역사에 대한 깊은 인식 을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음미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초 사가의 견식이 없어 망령 되이 노예의 근성으로 꾸며 찬술하는 솜씨를 남용하 여 국가의 체통이 손상될 것을 생각지 않고 오직 타 인을 숭배하는 데만 힘썼다.” “역사를 귀히 여기는 까닭은 국가의 체통을 높이 고 국민의 정신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지금 노예사관 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있으니, 어찌 노예근성을 길러 참담한 지경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역사가들은 본래 소견이 협소하여 압 록강 이서에는 애당초 생각이 이르지 못하였고 · · · 900년 문화대국을 느닷없이 일개 작은 선괴(仙怪)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조종 이래의 피를 흘려 개척해 온 땅을 마치 다 쓰 고 난 통발이나 올무처럼 여겨 잊어버리도록 버려두 었으니, 어찌 천년 문화의 역사가 이토록 비열하기에 이르렀는가? 대개 만주 온 땅은 부여 이래 우리나라 의 근본이요, 핵심이 되는 곳이다.” “우리 역사가들은 다만 신라만을 알고 발해를 알지 못하여 마침내 3천 년 조국의 후신을 먼 이역의 오랑 캐의 반열에 떠밀어 넣고 끝내 국내의 역사기록에 단 한 글자도 전해지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어 찌 공평한 의리를 주장한 신필(信筆)이라 하겠는가?”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고려대에서 경제학 ·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 ·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 임연구원을 지냈고, 현재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를 맡고 있다. 시대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에서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면암 최 익현 선생의 5대손이다. 필자 최진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