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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⑤ 93 다. 지역 경계가 일목요연하여 곧 역력하게 지적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들은 본래 소견이 협소하여 압록강 이서에는 애당초 생각이 이르지 못하였고, 마 침내 “졸본은 성천(成川)에 있다”하고 다시 ‘기린굴(猉 獜 窟)을 하늘에 조회하던 바위’라고 하는 등 황탄(荒 誕)한 말을 허다히 꾸며 냄으로써 900년 문화대국을 느닷없이 일개 작은 선괴(仙怪)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 다. 역사를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니 절로 허희탄식을 금할 수 없다. 28일 오후에 『신라사』를 읽었다. 살피건대, 시 조 혁거세로부터 22세 지증왕에 이르러 비로소 국호 를 정하고 왕으로 칭하였다면, 서차가 마땅히 고구려 와 백제의 뒤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강역을 다만 본 국의 역사서에만 의거하면, 처음부터 압록강 이북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唐) 용삭(龍朔 당고종의 연 호. 661~663년) 연간에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말갈 의 영토를 겸병하였다”고 한 것은 “말갈이 신라의 대 령(大嶺)과 장령(長嶺)의 성책을 여러 번 침략하였다” 고 한 것과 서로 어긋난다. 대령은 곧 독립한 장백산 이요, 장령은 곧 흥경(興京, 현재 新賓縣-필자) 북쪽의 장령자(長嶺子)이다. 또 당나라 항종(亢宗)의 『행정록 行程錄』에 이르기를 “함주(咸州. 지금의 개원)에서부 터 동주(同州 지금의 철령) 동쪽의 망대산(望大山)에 이르기까지는 곧 신라 영역이다”라고 하였고, 또 『요 사遼史』에 이르기를 “해주의 동쪽은 신라에 접경이 된다”고 하였고, 『만주원류고』에 이르기를 “계림(鷄 林)은 곧 길림(吉林)이다”라 하였으니, 계(鷄)와 길(吉) 은 음이 서로 똑같고, 지리상의 핵심이라는 것 또한 부합한다. 여러 서적에 실린 것이 이와같이 명확한데 도 우리나라 사가들은 대령이 평안도에 있었으며, 또 금계(金鷄) 등의 궤탄(詭誕)한 설을 장황하게 꾸며내 어 계림이 경주에 있다고 하였다. 조종 이래의 피를 흘려 개척해 온 땅을 마치 다 쓰 ➊ 1910년대 광개토대왕릉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➋ 고구려 오골성(중국 요녕성 봉성시) 북쪽 성벽(전성영 제공) ➊ 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