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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⑤ 91 京, 현재 심양-필자) 등지를 거 쳐 봉황성(鳳凰城)을 지나 조선 에 걸쳐 있었다”하고, 또 “부여 는 안령산맥(安嶺山脈)의 동쪽 눈강(嫩江)유역에서 나라를 일 으켜 과이심(科爾沁) · 몽고 땅에 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에 근거하면, 고등왕이 도읍했던 북부여의 땅은 아마도 흑룡 · 길 림 등지로서 세 성을 다 차지하 고, 서쪽으로는 몽고에 이르며, 남으로는 조선에 걸쳐 그 길이 가 5~6천 리였다. 이때의 국호 를 혹 두막루(豆莫婁)라 칭하였 던 것인가. 또 『한서』와 『진서』에 모두 이르기를, “부여는 현토 의 북방 천 여리이니 땅이 사방 2천리이다. 현토는 지 금 대개 평해성 복주(復州) 등지이다”라고 하였다. 원 류고에 이르기를 “발해의 부여부(夫餘府)는 곧 부여의 국도가 있던 곳이니 지금의 개원이다”라고 하고 또 “부여는 본래 예(穢)의 땅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 안 에 옛날 예성(穢城)이 있고 그 왕의 인장을 「 예왕지인 穢王之印 」 이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의거하면 아 마도 북부여 중기 이후에 왕이 예의 백성을 쫓아내고 다시 개원으로 천도하였으나, 이때는 성경(盛京) 이남 이 조선 땅으로 이미 삼한이라는 나라가 있어 자치의 제도를 행하고 있었고, 흑룡강과 길림성 지경은 점점 읍루와 물길이 차지하게 되어 나라의 한계가 2천 리 를 넘지 못하였다. 본래 예 땅이었다고 하여 인장에 ‘예왕’이라고 칭하였던 것인가. 24일 본국사를 읽었다. 대저 우리나라의 역사 가는 기씨(箕氏)의 사적을 단군왕조의 정통에 이어서 기술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선배학 자 중 학문이 굉박하기가 허미수(許眉叟, 許穆-필자) 같은 분도 “단군의 후손이 기자를 피하여 부여로 천 도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이 우리나라 학자들의 뇌수에 깊이 각인 된 것이 이미 천여 년이다. 그러나 안팎의 여러 역사 서를 참고해 보아도 모두 확실한 근거가 없다. 당나라 배구(裵矩)전에 “해주(海州)는 옛 고려 땅이니, 곧 기자 가 봉해진 곳이다. 해주는 지금의 해성(海城)이다”라 고 하였고, 『만주지지』에 이르기를 “현토(玄菟 )는 사 군 중의 하나인데, 지금 대개 평해성(平海城) 복주(復 州) 등지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근거하면, 기자의 봉토는 아마도 지금의 해성일 듯하다. 『수사隋史』에 이르기를, “좌우 20군(軍)이 현토 · 낙 대종교의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 표지와 내지 삽화(초판본 1909년?, 이양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