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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해운당 김하락의 삶과 항일의병투쟁 85 이천의진과 청송의진이 통합하여, 의성연합의진을 결성하였다. 5월 14일, 의성연합의진은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 에서 관군과 맞닥뜨려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대구 방향에서 공격해오는 관군이 170여 명이었다. 이 때, 구연영과 신용희가 각각 우수한 의병을 진두지휘하 여 성황산(城隍山) 주변에 매복하고, 해운당이 높은 주봉에 올라 총지휘하였다. 관군은 의진이 매복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성황산 밑으로 진격해왔으 로, 해운당의 공격명령에 따라 일제히 사격을 개시 하였다. 이에 관군은 크게 놀라 도망가기에 바빴다. 용감한 의병이 관군을 향해 계속 총을 쏘았다. 수십 명의 관군이 총에 맞고 쓰러지니, 관군은 더 이상 싸 울 생각을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후, 의성연합의진은 금성산 골짜기에 자리잡은 수정사(水淨寺)에 본진을 차렸다. 그 다음 전투는 비 봉산 전투였다. 최전방에 배치된 조성학이 관군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전투에서 기습작전을 펼친 연합의진은 큰 전과를 올렸다. 5월 25일 이른 아침, 관군이 다시 공격해왔다. 이 날 전투는 오후 4 시까지 힘겨운 싸움이었다. 오랜 전투에 의병들 이 모 두 지쳐있었다. 5월 26일, 해운당은 남은 의병을 이 끌고 경주로 이동하였다. 경주에서 김병문 · 이시민 등 과 만나 경주연합의진을 결성하고, 해운당이 의병장 에 추대되었다. 이로써, 해운당은 을미의병의 마지막 기세를 올렸으나, 6월 23일 대구부(府) 소속 관군과 의 전투에서 3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김하락 의병부대는 7월 13~14일 영덕에서 일본 군과 대접전을 벌였으나, 또 크게 패함으로써 강물 에 뛰어 들어 죽음을 선택하였다. 이 때가 1896년 7 월 14일이었다. 김하락이 투신 자결한 경북 영덕 남천쑤(南川藪) 김하락이 본진을 설치한 수정사의 대광전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 ٠ 법과대학장 ٠ 산업 노사대학원장 ٠ 행정법무대학원장 ٠ 부총장 ٠ 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 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 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 포럼 대 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 권용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