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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해운당 김하락의 삶과 항일의병투쟁 83 김씨와 풍양(豊壤) 조씨(趙氏)의 세도정치 척결과 지 배계급의 횡포를 억누름으로써 흩어진 민심을 바로 잡아나갔다. 그런데, 이 무렵은 미국 · 영국 · 프랑스 · 독 일 · 러시아 등 세계열강들이 통상을 요구해왔으며, 일 본도 이에 뒤질세라 조선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키워 가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열강들의 움직임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을 그들의 각축장으로 만들어갔다. 더욱이, 1876년(고종 13년) 2월 일본은 운요호사 건(雲揚號事件, 1875년)을 빌미로 하여 강화도조약 을 체결하면서, 정치적 · 경제적 세력을 조선에 침투 시키는 구실로 삼았다. 이로써, 국내의 정세가 요동 치고 있을 무렵, 1884년(고종 21년) 10월 17일 김옥 균 · 박영효 · 홍영식 등의 급진개화파에 의한 갑신정 변으로 인하여 청(淸) · 일(日) 양국 간의 충돌을 불러 왔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1894년(고종 31년) 6월 21일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갑오변란(甲午變亂, 일명 갑오 왜란)’이라고 이름하는데, 일본은 이를 계기로 우리 의 조정을 옥죄어왔다. 이에 더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1895년 (고종 32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의 을미사변(乙未事 變)이었다. 이는 갑오변란이 있은 후 명성황후(明成 皇后)가 러시아를 끌어들였다고 판단한 조선 주재 일 본공사 미우라 고오로(三浦梧樓)가 일본군을 지휘하 여 명성황후를 참살한 사건이었다. 이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사절이 주재국의 황후를 참살한 사건 으로서, 어느 나라의 외교사에도 찾아볼 수 없는 상 상을 초월하는 참극이었다. 국내에서는 이 사건이 있은 후 ‘왜놈들이 감히 궁 궐에 침입해서 국모를 살해하다니 개 · 돼지보다 못한 놈들’이라는 반일감정이 격화되었으며, 전국 각지에 서 항일의병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 하 에 11월 15일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단발령을 선포 하자 의병항쟁의 불길이 하늘을 찔렀다. 이 때, 단발 령은 형식상으로는 왕명에 의한 것이었으나, 그 배후 에 일본의 압력과 친일내각의 횡포가 도사리고 있다 김하락(1846~1896) 김하락 의진이 점령한 남한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