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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2023년 7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1925년 2월 22일 도쿄에서 조직되었고, 1926년 김 천해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서 중앙집행위원으 로 활동했다. 이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서 전국 적인 전망을 갖고 활동한 그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 맹 제4회 대회를 주도했다. 1928년 4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원은 26,114명 이 되었다. 이 가운데 간부로 중앙집행위원장 김천 해가 등장한다. 이후 쟁의부장으로도 활동했다. 특히 1928년 5월 15일 오후 2시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는 의장 김천해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출석원은 김천해, 남영우, 송창렴, 이성백, 김강, 이일, 서진문, 권일선, 박휘일, 송장복, 김문준, 김달환 등 13명이었다. 김천해가 주도한 제1회 상임위원회는 1928년 6월 1일 열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결정했다. 첫째, 중국 출병 반대, 치안유지법 개악 반대, 폭압 반대 주간을 설정하고, 제1기에 각 지부 · 반을 통해 반대주간의 특별강좌, 조합원 간담회, 연설회 등을 개최하며, 그 주간의 의의를 대중적으로 선전할 것, 제2기에 조선인대회와 노동자대회를 열어 항의문을 보내고 함께 데모할 것을 결정했다. 둘째, 당면한 슬 로건 12항목, 셋째, 부(府)의원 선거대책으로 무산당 후보자를 적극적으로 원조할 것을 결의했다. 넷째, 조직 및 선전부장 박균, 서무 및 재정부장 진병로, 정 치부장 송창렴, 쟁의부장 김천해, 기관지부장 김강, 조사 · 정보 · 부녀부장 윤도순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김천해는 새로운 투쟁을 위한 조직적 활동을 적극적 으로 선도했다. 그는 조직 투쟁의 핵심이었다. 2)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서의 활동 김천해의 또 다른 민족운동가로서의 모습은 조선 공산당 4차당 일본총국에서 볼 수 있다. 조선공산당 4차당은 새롭게 일본총국의 중앙을 조직했다. 그는 1928년 5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조선공산당 일 본총국 남부야체이카 소속이 되었다. 1928년 6월 조 선공산당 일본총국 책임비서 한림이 검거되자, 강소 천, 송창염, 인정식 등은 새롭게 조직을 개편했다. 조 선공산당 일본총국은 책임비서에 김천해를 새로 임 명했다. 그리고 조직부 책임 서인식, 조직부원 인정 식, 선전부 책임 박득현(朴得鉉), 선전부 부원 이학순 (李學淳)으로 구성했다. 이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은 김천해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공산당 일 본총국은 김천해 책임비서 시기에 조직적 발전이 도 모되어, 도쿄야체이카가 종전의 4구(區)에서 1구가 늘어나 5구가 되었다. 1928년 8월 29일 오후 약 150명의 조선인 노동 자와 유학생들은 무사시노(武藏屋)백화점 옆 공터에 서 혁명가를 부르고, 삐라를 살포하며, 거리를 행진 했다. 이때 재도쿄조선인단체협의회 이외의 세 단체 이름으로 「 국치일에 즈음하여 전조선 2천3백만 동 포는 일제히 무장하여 일대 폭동을 일으키자」 는 격 문을 배포했다. 여기에서는 국치일의 의미를 되새기 고 동시에 독일과 러시아 혁명세력들과의 단결을 강 조하는 등 국제 연대를 피력했다. 이 투쟁을 조선공 산당 일본총국 책임비서로 주도했다. 그러나 그가 주도한 1928년 8월 국치일 기념투쟁은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을 조직적으로 와해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 다. 김천해는 동지 36명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 혐 의로 검거되었다. 김천해는 감옥에서도 야수적인 일제의 탄압에 맞 서 옥내 투쟁을 전개했다. 간수들의 눈을 피해 형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