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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023년 7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해 보고를 받았다. 계속된 간부회의에서 동부야체 이카책임을 맡고, 지속적으로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을 지도했다.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이 주도한 1928 년 8월 국치일(國恥日)기념투쟁 때 동지 36명과 함께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31년 5년형을 받았다. 셋째, 김천해의 감옥에서의 투쟁이 주목된다. 감 옥 내에서 야수적인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옥내 투쟁을 전개했다. 대표적인 옥내 투쟁으로는 1930 년 3 · 1운동 기념투쟁, 메이데이투쟁 등을 들 수 있 다. 간수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그는 노크를 통해 통 방(通房)하며 연락을 취해 형무소 내 ‘사상운동’ 관계 자 전부가 만세를 부르게 했다. 그리고 『감방신문』을 발간했다. 특히 일국일당주의에 따라 조선공산당 일 본총국이 일본공산당 내로 해소할 때 옥내에서 이를 주도했다. 공판 때는 조선공산당, 공산주의운동사에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선공산당을 대표해 진 술을 시도했다. 1932년 6년 징역을 언도받고 아키타 형무소(秋田刑務所)에서 복역했다. 여기에서 사노 마나부(佐野學)의 전향성명서를 접 하고도 끝까지 전향을 거부, 일본 당국을 상대로 투 쟁을 계속했다. 1936년 11월 출옥했다. 1936년 2월 이운수(李雲洙), 강창보(姜昌輔), 김두용(金斗鎔), 송성 철(宋性徹), 권오경(權五敬), 이북만(李北滿) 등이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의 계몽과 일본 ‘인민전선’의 일익으 로 도쿄에서 발간하던 『조선신문(朝鮮新聞)』 나고야 (名古屋)지국의 설립과 발전에 전력을 경주했다. 그 러다가 1937년 일본인민전선 탄압과 관련하여 검 거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4년형을 언도받고 사카이 형무소(堺刑務所)에서 복역을 마쳤으나, 1942년 9월 전향하지 않고 사회주의혁명을 확신하고 있다고 해 서, 조선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도쿄예방구금소에 갇 히게 되었다. 결국 김천해는 일본의 패전 이후 연합군사령부에 의해 1945년 10월 4일 치안유지법이 철폐되어 감옥 에서 나왔다.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 화가 가와메 테이지(河目悌二)의 조선인  학살 그림 2022년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 중 국인 학살 관련 학술대회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