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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재일한인 독립운동사의 신조명 ① 77 들에 비해 많다. 그의 행적을 통해 재일조선인 민족 운동을 다시 살펴보자. 일제강점기 김천해의 생애사 보기 김천해는 경남 울산 빈농 출신으로 해산물상을 하 는 집에서 1898년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문을 배웠 고, 이후 불문(佛門)에 입문하여 19세 때 경성의 중앙 학림에서 수학했다. 23세 때는 고향에서 부업인 해 산물상을 했으며, 동시에 야학을 열어 지방의 농민 을 교육했다. 교사로 활동하다가 1921년 도쿄(東京) 에 갔다. 그는 토목노동을 하면서 일본대학(日本大 學)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다 중퇴했다. 주목되는 행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민족운동가로서의 김천해의 행적에서 주목 되는 첫해는 1922년이다. 그는 도쿄조선노동동맹회 결성에 참가했다. 그리고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 선인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 학업을 포기함과 동시 에 노동자의 복리 증진에 헌신할 것을 결의했다. 강 철이라도 녹일 것 같은 열의와 지성으로 그는 요코 하마(橫浜)에서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대중 속에 들어간 그는 그들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 꾸준히 그들을 계몽하고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남 의 딱한 사정을 이해하고 누가 병이나 불행한 일이 생기면 밤중이라도 꼭 방문하여 위로해 주며, 돈이 없으면 자신의 양복을 팔아 주었다. 이 시기에 그는 이런 활동을 했다. 1925년 7월 요코하마에서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조선합동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상무집행위원으로 활 동했다. 당시 김천해가 주도한 이 조직은 요코하마 노동자의 인구비례에 비하면 가장 우수한 조직 성과 를 거두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서는 19 26년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28년 5월 중앙집 행위원장 겸 쟁의부장이 되었다. 특히 그의 명성은 일본 내에 널리 알려져, 당시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 는 노동운동의 오르그(노동조합의 말단 조직)는 김 천해의 소개장 하나면 대환영이었다. 둘째, 김천해는 1928년 이후 재일조선인 민족운 동에서 전위적 활동가로서 중심적 역할을 본격적으 로 전개했다. 그는 1928년 5월 한림의 권유로 조선 공산당에 가입하여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남부야체 이카 소속이 되었다. 1928년 6월 초순 남부야체이카 회의에 참석해서 정희영의 보고에 기초해 일본 당국 등과의 투쟁 방향에 대해 협의했다. 1928년 6월 24 일 회의에서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개편의 내용을 송 창염에게서 듣고, 자신이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책임 비서가 된 것을 수용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송창염 으로부터 당의 연혁, 조직의 대요, 입당수속 등에 대 김천해(1898~?, 세계한민족문화대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