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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용암처럼 끓어오른 탐라의 횃불 “김옥련” 73 당시 하도리에는 야학이 있었는데, 김옥련 지사 는 물질을 하면서 촌음을 아껴 야학에서 열심히 신 문학을 받아들여 공부했다. 야학에서 한민족의 역 사, 지리 등을 배우면서 민족의식이 싹텄고, 야학을 함께 하는 동급생끼리 일제 침략의 부당성 등을 성토하 기도 했다. 22살 되던 해인 1929년 하도리(下道里)에 는 여성단체로 부인회, 소 녀회 등이 조직되어 있었는 데, 부인회 회장은 부춘화, 소녀회 회장은 김옥련이 맡 고 있었다. 당시 일제의 수 탈이 정점에 달하자 김옥련 을 포함한 해녀들은 더 이 상 참고 있을 수 없다는 결 론에 도달한다. 마침내 1931년 물질을 생업으로 하던 해녀들 은 일본 관리들의 가혹한 대우와 제주도해녀조합 어 용화의 폐단이 날로 심해지자 12월 20일 요구조 건과 투쟁방침을 결의하였다. 그러고는 이듬해인 1932년 1월 7일과 12일 김옥련 지사는 구좌면에 서 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시위 운동을 주도하고,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부춘화 지 사 등과 함께 도지사 다구치(田口禎熹)와 담판을 벌 여 요구조건을 받아냈다. 또한 1월 26일에는 제주도 항일운동가의 검거를 저지하려다 잡혀 6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이때 김 옥련, 부춘화, 부덕량을 대표로, 하도·세화·우도·종 달·시흥·오조 등 6개리의 해녀들이 모였다. 제주해 녀(잠녀)항쟁에 참가한 숫자만 연인원 1만 7,000명 에 이르렀다. 제주잠녀항쟁은 투쟁의 주체가 연약 한 여성집단이었고, 한국 최대 규모의 어민투쟁이 었다는데 의의가 깊다. 이 투쟁은 조천지역의 만세 하도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 사진. 맨 윗줄 가운데가 부춘화, 두번째 줄 동그라미 표시가 김 옥련, 오른쪽으로 두 번째가 부덕량 지사다(국가보훈부 제공). 해녀 출신 독립운동가 김옥련 지사(따님 한인숙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