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page

7월의 독립운동가 • 유만수 · 강윤국 선생 69 단 대상자로 삼았다. 박춘금 처단을 위해 유만수는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다이너마이트를 조달했으며, 강윤국은 아버지 국수공장에 자주오던 일본군 헌병 장교에게서 권총 을 탈취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또한 강윤국 이 서울 장사동에 대한애국청년당의 비밀아지트로 구해놓은 하숙방에서 시한폭탄을 제작하였다. 드디 어 1945년 7월 24일, 강윤국은 유만수를 비롯한 대 한애국청년당은‘아시아민족분격대회’가 개최된 부 민관으로 향하여 폭탄을 설치하여 대회장을 폭파하 였다. 의거 이후 유만수, 강윤국, 조문기 등은 체포 되지 않고 피신하여 해방을 맞이하였다. 부민관폭파의거의 의의 이 의거는 일본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을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결행된 사건이었다. 이는 독립운동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전 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역 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이 의거의 주인공들은 1920년대 이후 출생 하였다. 비록 반식민지 상태에 있었지만 ‘독립’을 경 험하지 못한 인물들이 중심이 되었던 사건이었 다. 이처럼 일제의 민족차별에 분노하여 의거를 일으 켰다. 특히 그 시기가 말 그대로 ‘엄혹’한 시대적 배 경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즉 패망 직전 일제가 단 말마적으로 조선민족을 전쟁에 동원하던 전시체제 말기 식민지 수도 한복판인 경성부의 부민회관에 서 거행된 친일집회에 폭탄의거를 수행하였다. 더 욱이 한 개인의 활동이 아니라‘대한애국청년당’이 라는 조직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해방 직전 까지 국내에서 독립운동단체가 활동했음을 보여주 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둘째, 이들이 독립운동을 ‘직업적’으로 했던 인물 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만수와 조문기에게서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력들을 찾을 수 있으나, 강윤 국, 우동학, 권준 등에게서는 (자료의 한계상) 이를 찾을 수 없었다. 즉 독립운동세력과 연결되지 않은 인물들이 자생적,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 다는 점에서 이 시기 식민지 조선민중들에게 일제 의 식민지 지배는 타도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 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