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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2023년 7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7월의 독립운동가 그는 조선인의 차별받는 현실을 몸소 체험하여 자 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한성공업학 교 야간부에 적을 두고 낮에는 신문을 돌리고 공장 에 나가 노동을 하면서 미래를 준비했다. 하지만 식 민지 현실에서 조선 청년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것 을 깨달았다. 즉 그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 자 신의 현실이자 극복해야 할 과제임을 깨달았고, 독립만 이 자신과 민족의 살 길이라는 생각을 품고 독립운 동을 위해 만주로의 망명을 계획했다. 그러나 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 조직을 찾을 수 없어 6개월만에 조선으로 귀국하여 “국내에서 일 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일을 벌여” 보고 자 했다. 그러나 동지 없이 혼자서 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에서 “일을 벌이기 위해” 훈련공 모 집 광고를 보고 지원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가 배치받은 곳은 일본강관주식회사 가와사 키(川崎)공장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 인 조문기와 강윤국을 만나게 되었다. 이 가와사 키공장에서 유만수는 조문기 등과 함께 1943년 파업을 주도했다고 한다. 같은 시기 이 공장에 근 무하였던 김경석(金景錫)의 기억과도 상당부분 일 치한다고 할 수 있다. 다 만 『슬픈 조국의 노래』에 는 가와사키공장 파업이 1944년 5월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1943년 5월 이 맞다. 일본 내무성 경 보국(警保局) 보안과(保安 課)에서 발행한 『특고월 보(特高月報)』에도 1944 년 5월에는 파업이 없었 고, 1943년 5월에 파업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파업 이후 유만수는 일본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고, 화성 매송초등학교 내 조문기 동상(경기일보 제공) 일본 제국 중의원에 당선되었을 당시 박춘금(앞줄 가운데, 나무 위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