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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023년 7월 Special Theme  6 · 25전쟁 정전70주년 특집 독립군 · 광복군에서 국군으로 활약한 인물들 있었고, 이들은 그 경력을 인정받아 창설되는 국군 의 중심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특히 특별반의 경우 모집 당시부터 응모 자격 자 체를 20세 이상의 각 대학 전문부 졸업자 및 전문 학부 재학생 이상 급 일본군 기타 각 군 출신 하사 관 이상의 경력을 가진자로 제한하였다(《조선일보》 1948.9.15, ‘사관후보생 모집’). 이것은 국군 창설 과 정에서 여러 가지 사정상 일본군에서 복무한 경험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들의 경험을 그에 부합한 경력으로 인정하기로 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생도의 경우 소위 계급으로 임관했 지만, 특별반 출신은 이전 군사 경력에 따라 각각 다 른 계급으로 임관하여 조기에 고위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불만과 갈등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준식은 무엇보다 대한민국 국군의 건설과 대내외적인 위협에서 신생 조국을 수 호해야 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그 이전 경력에 대해 서는 당시에는 양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인 식하였다. 그와 함께 특별 1반에서 교육을 받고 임관한 이는 총 11명이었다. 이 중에 대령으로 임관한 이는 이준 식을 비롯하여 김석원, 유승렬, 안병범, 권준, 백홍석, 오광선 등 총 7명이었다. 안춘생은 중령으로, 전성호 는 소령으로, 홍성삼, 권길근은 대위로 임관하였다. 이중 독립군 경력을 인정받은 이는 이준식, 권준, 안 춘생, 전성호 등이었다. 하지만 김석원, 류승렬 등은 일본군 대좌로서 사실상 조선인 출신으로 극히 일부 를 제외하고 최상위 직위까지 오른 이들이었다. 화 강 이준식은 오랜 기간 독립군으로서 이들을 상대로 항일전쟁을 했지만, 당면한 상황과 조국 수호라는 목적을 위해 이들과 합류하여 국군을 창설하는데 기 여하고자 하였다. 국군에서의 활약과 영덕지구 전투 승리 그는 이후 국군의 주요 전력으로 활동하게 되는 7 사단의 창설을 비롯하여 6 · 25전쟁 이후에는 교육총 감, 제1훈련소장 등 육군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중요 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의 공헌은 그가 부대 창설 과 초기 훈련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7사단이 6 · 25전쟁 중에 평양 탈환작전을 비롯하여 현리 전 투, 피의 능선전투,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등 주요 전 투에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비록 화강 이준식은 6 · 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7 사단장에서 육군사관학교장으로 보직을 옮겼지만, 그가 국군 창설과 이후 교육 훈련 등을 통해 국군의 토대를 다지는데 기여한 공로는 무시할 수 없을 것 이다. 그가 처해 있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 공로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 25전쟁 발발 직후 그는 육사 생도와 국군 7사단 후퇴병력을 이끌고 서 울 방어전투를 지휘하였다. 특히 6 · 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0일 육 사 교장에서 제3사단장에 임명된 뒤, 23연대와 독립 제1대대를 지휘해 영해-영덕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에 따라 그는 7월 16일부터 영덕 북 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과 대치했다. 그는 북한군 5사단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국 7월 하순 까지 포항을 점령하려던 적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북한군 5사단은 40% 이상의 전투력을 잃고 패퇴하고 말았다. 이준식은 이 영덕지구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