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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김홍일의 독립운동과 국군에서의 활약 35 창설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뒤의 한국광복군 참모장 활약은 김구 주석이 장개석 총통에게 특별히 요청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장 개석 총통은 김홍일에게 “임시정 부의 형편을 듣고 할 수 없이 귀 관을 보내주는 것이니 장차 광복 군에 가서 더욱 빛나는 공훈을 세 우라”며 전출을 허락하였다. 김홍일은 1945년 5월 한국광 복군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이 해 8월 일제의 패망(광복) 후 김홍일 은 만주지역 한인 교민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중국군 소장으로 복귀했다. 만주접수군 사령부 한국교민처장으로서 임무를 완수하고 1948 년 8월 28일 뒤늦게 귀국했다. 그때는 대한민국 정 부가 수립된 직후였다. 국군 최초의 장군 임관과 6·25전쟁 지휘 뒤늦게 귀국한 김홍일은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의 권유로 국군에 들어가 1948 년 12월 10일, 육군 준장으로 바로 임관했다. 국군 역 사상 최초의 장군 임관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준장 진급 2개월도 안 된 1949년 2월 4일, 다시 육군 소장 으로 진급했다. 6 · 25이전 김홍일이 맡은 직책은 육군 사관학교장과 육군참모학교장이다. 1950년 6 · 25전쟁(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홍일의 비중과 역할이 커졌다. 전쟁초기 군은 수도 서울의 사수를 위해 전선을 2개로 양분하여 개성 축선은 김 홍일에게 맡기고, 의정부 축선은 채병덕 육군총장이 직접 지도하였다. 군 지휘관 중 사단급 이상 대부 대 지휘경험이 있는 사람은 김홍일이 유일했기 때문이 다. 서울이 함락되자 육군은 김홍일에게 또 다시 한 강선 방어를 책임질 시흥지구전투사령관이라는 중 책을 맡기고, 미군이 참전할 시간을 얻을 수 있도록 3 일간 한강선 방어를 지탱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 나 김홍일은 이 보다 두 배인 6일간 북한군의 한강도 하를 저지함으로써 미군과 유엔군이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해주었다. 한강선 방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김홍일은 또 다 시 새로 창설된 1군단장을 맡아 미국 본토의 증원병 력이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지연작전과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이 될 낙동강 방어작전을 성공 적으로 수행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 이 평가하고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육군 중장으 로 진급시켰다. 하지만 개전 초기부터 전투지휘관의 중책을 맡아 중국군 만주접수군사령부 한국교민처장  시절 김홍일 장군 국군 제1군단장 시절 평택지구에서 포항 탈환작전을 지휘할 당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