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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김홍일의 독립운동과 국군에서의 활약 33 김홍일은 귀주강무학교와 육군실시학교를 졸업 하고, 1920년 12월 상해로 돌아와 대한민국임시정 부 법무총장이 된 신규식과 군무부장 노백린을 만났 다. 노백린은 김홍일에게 민주로 갈 것을 종용했다. 당시 만주지역의 독립군들은 청산리대첩을 치른 후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들과 함께 활동하라고 하였다. 김홍일은 1921년 3월 상해를 출 발해 남경, 천진, 산해관, 봉천을 거쳐 백두산 부근의 안도현(安圖縣)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임시정부와 연 계를 맺고 있던 대한독립 군비단(軍備團)과 만났다. 그때 군비단은 러시아의 자유시로 향하고 있었다. 김홍일이 군비단과 함께 자유시로 가는 도중 이만이 라는 곳에 도착하여 정세를 살피고 있을 때 자유시 (알렉세프스크, 현 스바보드니)에 있던 독립군 수백 명이 피해를 입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1921년 6월 28일). 김홍일은 자유시 참변에서 살아남은 독립군들과 함께 이만에서 ‘독립군 총연합’을 결성할 목적으로 한국의용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중대장을 맡았다. 하 지만 한국의용군은 시베리아 이만에서 러시아 백군 (러시아혁명 반대파 군대)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많 은 피해를 입고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중국혁명군으로 북벌전쟁과 중일전쟁 참전 한국의용군이 해산되자 김홍일은 1922년 가을 이 만에서 북간도로 내려와 농장을 경영하고, 중학교 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러던 차 한국의용군사령관을 지낸 이용(李鏞)이 중 국 광동성 산두(汕頭)에서 중국혁명군 포병대에 복무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국민혁명군에 참여할 생 각으로 산두로 갔다. 김홍일이 산두에 도착한 것은 1926년 10월이었다. 그때 장개석(蔣介石)을 총사령관으로 한 국민혁명 군은 북벌전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김홍일은 그곳에 서 한국의용군총사령관 이용과 귀주 육군강무학교 동기생을 만나 그들의 주선으로 중국군 소교(小校·소 령) 계급과 함께 총사령부 참모로 발령받았다. 중국군에서 김홍일은 고급사령부 참모와 일선 전 투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부연대장 겸 대대장으로 참전한 김홍일은 용담전투에서 성공적인 지휘로 중 김홍일 재학시절의 오산학교 전경(1915년)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1864~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