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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23년 7월 Special Theme  6 · 25전쟁 정전70주년 특집 독립군 · 광복군에서 국군으로 활약한 인물들 김홍일(金弘壹, 1898.9.23~1980.8.8) 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풍미하며  독립운동가, 군인, 외교관, 정치인으 로서 애국적 삶을 살았다. 일제강점 기(대일항쟁기)에는 정주 오산학교 와 중국 귀주(貴州) 육군강무학교를  나와 러시아 연해주에서 한국의용군 사령부를 조직했다. 이후에도 중국  국민혁명군과 조선의용대, 한국광복 군에 가담하여 북벌전쟁과 중일전 쟁,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다.  해방 후에는 중국 동북(만주)지역 교 민들의 안전한 귀국과 신생 대한민 국 국군 건설에 참여하였다. 6·25전 쟁 때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이하 여 시흥지구전투사령관과 제1군단 장으로서 역할을 책임감있게 수행함 으로써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 낙동 강 방어선 형성과 인천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군을  떠나서는 중화민국(현 대만) 대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 외무 부 장관, 제7·8대 국회의원, 신민당  당수(1971~1972년)를 역임한 대한 민국 현대사의 거목이었다. 김홍일의 어린 시절과 중국 망명 김홍일은 1898년 9월 중국 단동(丹東, 과거 安東)과 가까운 평북 용천 군 양하면 오송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한반도가 열강들 의 세력다툼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조선은 청 일전쟁과 을미사변, 러일전쟁 등을 겪으며 점차 일제의 지배하에 들어 가게 됐다. 김홍일이 태어나고 성장한 어린 시절은 민족사적으로 바로 그런 격 랑과 격동의 시기였다. 그의 집안은 만주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할 만 큼 부유한 편이었다. 김홍일은 처음에는 만주 봉천(현 심양)에서 소학교 를 다녔으나, 중국인들의 차별과 멸시를 받자 고향으로 돌아와 정주의 오산학교로 전학했다. 1914년~1918년 오산학교에서의 배움으로 민족 과 독립에 대한 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졸업 후 김홍일은 학교 설립자 인 이승훈(李昇薰) 선생의 추천으로 황해도 신천의 경신학교 교사가 되 어 그곳 민족운동 지도자들과 교류를 갖게 되었다. 일제 경찰은 그런 김 홍일을 주시하며 감시하였다. 국내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낀 김홍일 은 중국으로 망명을 하게 되었다. 귀주 육군강무학교 졸업 후 연해주에서 한국의용군사령부 조직 김홍일은 1918년 9월 신의주와 중국 단동을 거쳐 독립운동의 거점 인 상해(上海)로 가서 신규식을 찾아갔다. 신규식은 김홍일에게 국제정 세를 알려주며 군관학교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때마침 중국인 황개 민의 소개로 귀주(貴州) 육군강무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귀주 육군강 무학교는 당계요(唐繼堯)가 귀주성 귀양(貴陽)에 세운 장교 양성 사관학 교로 일명 귀주 강무당(講武堂)이라고 한다. 당계요는 운남성 군벌로 일 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 1918년 12월 귀양에 도착한 김홍일은 귀주 육군강무학교에 왕웅(王 雄)이라는 이름으로 입교하였다. 그곳에서 1년 동안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고 1919년 12월 30일 귀주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호남성 에 있는 육군실시학교(陸軍實施學校)에서 6개월 과정의 포병병과 교육 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