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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철기 이범석의 독립운동과 국군 29 월 16일 오전 4시 30분 미군비행기 로 시안을 출발하여 산둥(山東)반도 에 이르렀다. 이때 일본군이 연합군 에 대해 계속 공격을 감행한다는 보 고를 받고, 시안으로 돌아갔다. 8월 18일 재차 국내진입작전을 추 진하였다. 미군비행기 C-47을 타고 시안을 출발하여 오후 12시경 여의 도 비행장에 내렸다. 그러나 일본군 이 포위하고, 국내진입을 가로 막았 다. 이범석 등은 “중국전구사령관 웨 드마이어(Wedmeyer)의 지시로 연합 군 포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예비대로 왔다”고 하 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신임장이 없다는 것과 도쿄 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했다며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할 수 없이 8월 19일 여의도 비행장을 이 륙하여, 산둥성의 유현(維縣) 비행장을 거쳐 8월 28 일 시안으로 돌아갔다. 이범석 등 한국광복군 국내 정진대와 미군은 비록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 해 활동하지 못한 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지 만, 해방 후 해외 독립운동세력 중 가장 먼저 국내에 첫발을 내딛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광복 후 국군 창설에 기여 1945년 8월 일제 패망 후 이범석은 한국광복군의 조직을 확대하는 활동과 교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주 선하는 데 힘썼다. 임시정부는 중국정부에 일본군으 로 끌려나온 한적(韓籍) 장병들을 광복군에 편입하도 록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동시에 중국에 이주해 있 는 한인청년들을 광복군으로 편성한다는 확군 방침 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광복군 대원들은 중국대륙 각지에 파 견 되어 확군활동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교포들을 보 호하는 활동과 귀국을 주선하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광복군 제2지대를 이끌던 이범석은 뤄양(洛陽)·카이 펑(開封) 등지로 진출하여 확군 활동과 교포들의 보 호 및 귀국을 주선하는 활동을 지휘하였다. 교포들 의 귀국이 거의 완료된 후인 1946년 6월 3일 이범석 은 광복군 대원 5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하였다. 이범석이 귀국하였을 무렵 국내정세는 매우 혼란 한 상태였다. 광복군이 귀국하였지만, 임시정부는 별 다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범 석은 청년운동이라는 독자적인 활동방향을 모색하 였다. 1946년 10월 이범석은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 청)을 조직하고, 비정치·비종파·비군사를 행동원칙 으로, ‘국가지상 민족지상’을 이념으로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창단 2년 만에 민족청년단을 115만명 조선민족청년단을 사열하고 있는 이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