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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철기 이범석의 독립운동과 국군 27 산(馬占山) 부대에 가담하여 항일전쟁에 동참하였다. 1933년 중국 국민당 정부는 마점산을 구라파(유럽) 군사사절단 단장으로 임명하고, 유럽 각국의 군사시 설을 시찰하도록 하였다. 이범석도 시찰단의 일원이 되어, 52일 동안 러시아·폴란드·독일·이태리 등을 둘 러보았다. 1934년 2월 김구가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에 한인특별반을 설립하였을 때, 이범석은 학생대장 에 임명되었다. 지청천, 오광선, 조경한 등의 교관과 함께,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독립전쟁을 위한 군 사교육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그후 다시 중국군에 들어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부터 중국 항전 사에서 유명한 태아장(台兒庄)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다. 한국광복군 창설과 국내진입작전 추진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가 한국광복군 창설을 추진하 자, 이범석은 1940년 6월 중 국군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로 돌아왔다. 임시정부에서 한 국광복군 창설위원회를 조직 하였을 때, 그는 박찬익·지청 천 등과 함께 위원으로 광복 군 창설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총사령부 구성이 완료되고 부 대편제 방침이 결정된 후, 9월 15일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 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 구 명의로 9월 17일 광복군을 창설한다는 내용의 ‘한국광복군선언문’이 발표됨 으 로써 광복군 창설을 대내외에 선언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성립된 후, 광복군이 추진해나갈 당면전략이 수립되었다. 광 복군의 경비와 장비는 외국의 원조를 받고, 초모활 한국광복군 창립기념식(중국 충칭, 1940.9.17) 한국광복군 참모장 시절의 이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