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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컬럼 • ‘정전협정’ 70주년을 돌아보며 13 정전협정을 반대하고 전쟁 발발 이후 수없이 북진 통일을 외쳤던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의 일방적 인 석방 등으로서 미국에 저항하였다. 정전협정을 수 용하면서 미국에게 휴전 후 북한의 재침에 대비한 강 력한 군사동맹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한국에게 방위 조약을 약속하였다. 이에 따라 정전협정이 조인된 직 후인 8월 8일 서울에서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 사이에 가조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10 월 1일 워싱턴에서 정식으로 조인하였다. 이 조약은 1954년 11월 18일 발효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미국 은 그들의 육 · 해 · 공군을 한국영토와 그 부근에 배치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한국에의 미군주둔은 한국방위의 핵심전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및 동북아에서 전쟁억지력으로서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조약 이 체결됨으로써 한미방위체제는 한국방위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의 방위력의 증강은 물론 경제적 발전까지 이룩할 수 있었다. 연합 방위체제의 실질적 운영주체로서 ‘한·미 연합사령부’ (CFC)를 1978년 11월 8일 창설하였다. ‘차가운 평화 Cold Peace’의 시대를 넘어서 우리는 정전체제하에서 70년을 살아왔다. 지난 시 기에 6 · 25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은 재발하지 않 았지만, 북한은 끊임없이 도발하여 정전협정을 위반 하였다. 무장공비 31명의 1 · 21청와대기습미수사건 (1968), 푸에블로호 납치사건(1968. 1. 23), 삼척 · 울 진 무장공비 120명 침투사건(1968. 10~11), 도끼만 행사건(1978. 8. 18), 강릉침투사건(1996. 9. 17), 천 안함 피격사건(2010. 3. 26), 연평도 포격도발사건 (2010. 11. 23), 중서부전선의 목함지뢰 사건(2015. 8. 4), 북 소형 무인기 5대 김포 전방 MLD 침범사건 (2022. 12. 26) 등이 발생하였다. 이에 한국도 미국과 의 연합방위체제 뿐만 아니라 민·관·군이 합동으로 참여하는 강력한 민방위체제를 구축하면서 철저하 게 대응해왔다. 이제 6 · 25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 지났다. 전쟁 이 멈춘 지는 70주년을 맞는다. 오늘날 우리의 발목 을 붙잡고 있는 남북 관계의 수많은 문제들이 대부 분 전쟁으로부터 직 · 간접적으로 연유한 것들이다. 이산가족문제, 국군포로문제, 서해북방한계선 문제, 한미동맹체제, 한반도 평화체제 등이 모두 6 · 25전쟁 의 유산이다. 먼저 6 · 25전쟁을 바로 알아야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6 · 25전쟁사 에서 감계(鑑戒)의 요소를 살펴서 교훈으로 삼아도 좋을 일이다. 전쟁이 끝나야 평화가 온다!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육사 사학과 교수, 전쟁기념관 학예부장, 서강대 강사를 역임했다. 현재 부천시박물관장에 재직하고 있다. 『한 민 족전쟁사총론』,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 『나라를 지켜낸 무기와 무예』, 『국외소재 19세기 조선의 군사유물 연구』 등의 저서(공저)를 펴냈다. 필자 김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