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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 판문점 115 두절 이후 23년만에 남 북간 연락통로가 마련 되었다. 그리고 군사정 전위원회의 비중보다 남북대화의 기능이 점 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 이다. 판문점은 남북한 비 교에서 북한이 절대적 으로 우위를 점하는 장 소로서 공동관리구역인 이곳의 공산군측 관리자는 북한이다. 유 엔군측 관리자는 미군이 주축이 며 군사정전위원회는 쌍방수석대 표만이 발언하도록 되어 있는데, 유엔군측 역대 수석대표는 미군 장성이었으나, 1991년 3월 한국 군장성으로 바뀌었으며, 공산군측 은 북한군장성이 수석대표이다. 판문점의 성격 변화와 향후 전망 북한은 이와 같은 상황을 휴전 협정 초기부터 최대한으로 대내 외 선전에 이용하여왔다. 북한은 판문점을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 과 직접 1:1의 담판을 하는 콧대 높은 장소로, 한국을 미국에 예속 된 존재로 악선전을 하는 자료로 이용할 수 있었고, 또 폐쇄 고립된 북한이 자유세계를 향하여 불만 을 분출시키는 선전장이 되기도 하였다. 판문점이 지닌 이러한 요인들 은 휴전(정전)의 장기화에 기여했 다고도 볼 수 있다. 판문점은 군 사정전위원회와 남북간의 접촉과 대화의 장소만이 아니라, 북한이 미국정부나 미국 국회를 상대로 협상과 접촉을 하는 장소로도 이 용되었다. 1990년 5월 28일 판문점에서 북한은 6 · 25전쟁 당시 북한측 지 역에서 사망한 미군 유해 5구를 미하원의원(원호위원장) 일행에 게 인도하였다. 이는 북한이 미 국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한 협상 과 접촉장소로 판문점을 이용한 사례이다. 이 밖에 북한은 1990년 8월 15 일 범민족대회를 판문점구역 안 에서 개최함으로써 판문점을 대 남통일전선을 목표로 하는 정치 집회장으로도 이용하였다. 한편 1990년대 들어서면서 북한이 북· 미간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강화 하며 정전협정의 무실화를 기도 함에 따라 판문점이 정전협정 기 구의 회의장으로서의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윤석열 정부 와 북한의 김정은 정권 시기에 판 문점에서의 남북 대화나 남북 교 류협력을 논하는 기회는 쉽게 오 지 않을 듯 하다. 그러나 분단 78 년, 6 · 25전쟁 정전 70년을 맞는 오늘, 남북한의 대립과 갈등, 군사 적 충돌 위기와 블록간의 ‘신냉전’ 기류를 극복하고, 중장기적으로 남북한의 화합과 통일을 지향해 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학술서 『판문점 체제의 기원』 (2015) 사진집 『판문점과 비무장지대』 (2013) 이호철의 소설 『판문점』(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