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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93회) • 황해도 신천의 만세시위 (2) 105 4월 6, 7일 북부면, 가련면, 용문면, 두라면 4월 6일 북부면 석당리에서 소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월 7일 밤에도 북부면 주민 약 50명이 북부면 석당헌병주재소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4월 7일 가련면 조우리에서 4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4월 8일 밤에도 전날에 이어 다시 조우리에 서 400명이 조우 헌병 주재소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 다. 헌병의 진압과정에서 수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명이 검거되었다. 용문면에서도 4월 7일 밤 복우리 등지의 기독교 인과 천도교인 등 약 150명이 사창리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했다. 시위는 주재소 창문을 부 수는 등 격화되었다. 헌병이 총을 쏴서 1명이 사망 했다. 이날 12명이 검거되었는데 복우리 이치재(李 致才), 권태응(權泰應)은 징역 3년, 삼황리 김경두(金 慶斗)는 징역 2년 6개월에 처해졌다. 이치재 등 12명의 판결문에서 좀더 구체적인 내 용을 알 수 있다. 용문면의 이치재는 4월 7일 밤 사 창리에서 김응두(金慶斗), 권태응 등과 함께 방진성 (方鎭星), 권영구(權寧舊), 권영봉(權寧鳳), 권영수(權 寧燾), 박종선(朴宗善),권기수(權耆洙) 등 복우리 주 민 수백 명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했다. 만 세 시위대는 사창헌병주재소를 향해 나아갔다. 권영희 (權寧熺) 집에 있던 권오영(權五英), 이봉상(李鳳根) 3 명은 만세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와 시위대가 석화 동 앞 길에서 주재소를 향해 가는 것을 보고 합류했 다. 권녕도는 만세 소리를 듣고 집 밖으로 나와 조카 가 부상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주재소로 달려갔다. 주재소에 도착한 만세 군중들은 유리창 등을 파괴 했다. 4월 9일 밤 9시 두라면 원동 주민 약 200여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백운리로 나아갔다. 원동 (院洞)헌병주재소에서 출동하여 해산시키고 3명을 검거해갔다. 이리하여 신천읍내에서는 3월 27일 첫 시위가 일 어난 이래 3월 28일, 4월 6일과 7일 연 네 번에 걸쳐 일어났고, 노월면에서도 3월 29일과 4월 4일, 가련 면에서는 4월 7일에 이어 4월 8일 줄기차게 만세시 위가 일어났다. 용문면에서는 4월 7일 밤 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치열한 만세시위를 벌이다 인명피해를 입었고, 이치재 등 주도자들은 징역 3년의 선고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 임 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